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에서 두 번의 큰 이주 물결을 가져왔다. 이는 소련 붕괴 이후 가장 큰 러시아로부터의 이주였으며, 모국을 떠나는 러시아인들에게는 패닉적인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2022년 3월 국경이 폐쇄될 것이라는 소문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서둘러 나라를 떠났다. 이때 떠났던 많은 사람들은 국내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 9월 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부분 동원령을 발표했다. 이 후 러시아인들은 다시 피신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가격보다 훨씬 상승한 항공권 구매 외에도 공항과 육지 국경에서는 수 킬로...
2024.01.11 14:31어릴 때 기억 중 하나, 친구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출혈이 심해서였다. 출산이라는 축복이 장례라는 슬픔의 시공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사람들이 좁은 돌담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리 마을 유일하였던 한약방 어른의 얼굴도 순흑빛이 되었다. 이 경험이 어린 우리에게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왔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이리라. 삶과 죽음의 시공이 바뀌는 게 사실은 순간이자 찰나라는 것 말이다. 당골들의 분주한 발길이 괜한 마당만 즈려밟는 풍경의 중심, 작은 대나무 가지를 손에 잡고 죽은 이의 이야기에 집중하...
2024.01.11 13:31총소리가 울리고, 이순신이 두드리던 북소리가 끊긴다. 그것도 잠시, 다시 북소리가 울린다. 바다 위에서 치열한 백병전까지 펼친 전투는 조·명 연합수군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대장선의 분위기가 침울하다.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흐느끼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한 것이다. 처절한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의 장례 행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상여를 본 백성들이 통곡을 한다. 뛰놀던 아이들까지도 장례 행렬에 시선이 멈춘다. 상엿소리가 구슬프다. ‘본영으로 가자, 고금도로….’ 영화 ‘노량’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의 대미가 고금도로 ...
2024.01.11 11:00작년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자 미술관에 방문하는 관람객 수가 늘면서 주말에도 연장 근무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았는데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10대 자녀와 동행하는 한 가족의 도슨트 예약전화가 기억에 남는다.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으로서 이 특별한 가족들에게 시각예술 전시회를 어떻게 잘 설명해줘야 할지 어려운 고민과 걱정이 시작되었다. 특히 전시회를 눈이 보이지 않는 관람객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끔 특정한 단체나 기관에서 시각 장애인만을 위한 전시회를...
2024.01.07 16:37길을 걷다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나 그가 쓴 작품의 이름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주로 유명 레스토랑이나 음악 학원, 또는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간판으로 자주 쓰이는데 그러기에 푸치니는 다른 작곡가들 보다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유난히 후대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높은 완성도의 대본과 수려하고 완벽하다 할 수 있는 음악 구조를 그 이유라 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관객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주요 작품들은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호령하기까지 한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
2024.01.04 17:112024년을 청룡의 해라고 한다. 음력으로 쇠는 단위이고, 역(易)으로 따지면 입춘을 기점 삼는다. 요즘은 양력과 병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고대의 설날로 따지면 동짓날을 기점 삼기도 한다. 하지만 관념이나 제도 모두 늘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핏대 올리며 따질 이유까진 없다. 지구의 공전이나 고대로부터의 역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두 개의 해마다 상징을 넣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한 해를 ‘띠’라고 부르는 것은 고리, 매듭, 환대(環帶) 따위와 상관된다. 자세한 것은 따로 다룬다. 열두 띠 중에서 용띠가 이...
2024.01.04 10:5780년 전, 1943년 봄, 독일군이 점령한 볼린에서 대규모 인종 청소가 시작되었다. 대학살은 1943년 내내 그리고 1944년 전반기에 볼린과 갈리치아 전역에서 발생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이곳은 폴란드의 일부였다. 현재의 볼린 지역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해당된다. 갈리치아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부 지역이며 중심 도시는 우크라이나 르비우와 폴란드 크라쿠프이다. 이 범죄 행위는 나치가 아니라 폴란드인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과 우크라이나 저항군의 무장 세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폴란드 마을을 포위하고 여성...
2023.12.28 15:202023년 계묘년을 보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해였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뜬금없고 가닥 없는 퇴행이 도드라진 해였다. 세상이 정치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여 내심 불편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우리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형국이니. 정치에서 벗어나 오로지 문화를 말하고 문화로 실천하며 문화로 승부하는 세상이 올 수 있으려나. 개인적으로 정리해둬야 할 일들이 많지만, 논쟁은 언급해두고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은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이하여 2018년...
2023.12.28 13:22‘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흐르는/ 유달산 일등바위에 올라/ 거북이 등처럼 떠가는 섬들을 보라// 고하도 용머리를 휘돌아/ 삼색 깃발 나부끼며 귀항하는/ 고깃배가 끌고 오는 갈매기 떼를 보리….’ 김충경 시 ‘목포에 가면’의 앞부분이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섬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 선 섬이 고하도다. 고하도는 ‘용섬’으로 불린다. 섬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졌다. 실제 섬의 지형이 용처럼 길게 늘어서 목포의 남쪽을 감싸고 있다. 목포로 향하는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준다. 고하도는 목포시 달동에 속한다. ...
2023.12.28 13:08서해안의 매서운 바람 앞에 섰다 갯벌 깊숙한 곳에서 바지락을 캐는 아낙들도 들어가고 갈매기들과 나만 남아서 석양을 지켜본다.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지만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설 수는 없는 일. 늘 있는 일에 같은 것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느낌이 새롭지 않던가. 지금의 나 또한 지고 있는 해를 보고자 하기 보다는 그 분위기에 익어가는 시간을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잔뜩 찌푸린 날에도 틈새가 열리는 순간이 있다.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그 기회가 주어짐을 보아왔다...
2023.12.28 12:52위대한 작곡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樂聖(악성)’이라고 부른다. 후대에 가장 추앙을 받는 음악가, 고전파 음악의 집대성자 베토벤은 하지만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오페라 작곡가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초기 그가 작곡한 가곡 ‘아델라이데’나 ‘입맞춤’ 등을 들어보면 이탈리안적 수려한 선율에 깊은 감성을 자아내는 화성은 당시 민중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장르인 오페라를 성공적으로 제작했을 법도 한데, 그는 고전파 시대를 함께한 모차르트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유난히 모차르...
2023.12.21 17:54~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 그대 잘 가라~ 북한군 중사 오경필(송강호)을 뒤로하고 외다리를 건너오던 이수혁(이병헌)이 쓰러진다. 긴박한 군사들의 동선이 서로 뒤엉키는데, 비 내리는 숲과 나무들 사이로 귀에 익숙한 선율들이 헐떡이며 쫓아온다. 끝내 눈을 감는 주인공의 시야, 마치 헐거운 수의처럼 찢어지는 빗방울들, 빗살무늬의 가락들, 낙엽들, 바람들, 아니 핏방울 선연한 이야기들이 천천히 내려...
2023.12.21 12:35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는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자신의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러시아 세계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반러시아 압력의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고, 단기간에 독립된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적 사회적 기반은 완전히 침식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세대에게 러시아와의 공동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혐오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매우 심각한 상태다. 러시아 혐오로 대표적인 것으...
2023.12.14 14:47“한평생 짊어지고 온 삶/ 땅끝마을에 내려놓고/ 담배 한 대 피워무는 그대/ 아스라이 걸려 있는 시간들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렇게도 보기 싫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발자국들 속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지난 양력 동짓달 초순, ‘땅끝순례문학관’에 울려 퍼진 잔잔한 노래의 들머리, 내가 장구 하나 들고 남도 고유의 당골(무당) 소리로 음영(吟詠)하였다. 조각가 강대철이 소설가 송기원에게 헌정한 시(詩)에 음률을 넣은 곡이다. 강대철이 발의하여 준비하고 이 힘을 보탰으며 해남의 땅끝순례문학관이 주...
2023.12.14 12:46“썩을 놈들이 무담씨 시비를 걸어갖고 그라요. 거기 눈치 보느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문을 잠가났다요.” ‘혁명음악가’로 알려진 정율성의 화순 능주 옛집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의 얘기다. 어르신의 말투에서 정율성 기념사업에 딴지를 걸고 있는 정부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묻어난다. 정율성 옛집의 안방 문고리에 ‘수리중’이라는 빨간 안내 문구가 걸린 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보훈부장관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정율성 기념사업에 대한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한창 진행되던 광주와 화순의 정율성 기념사업이 더디거나 답보상태에 빠졌다...
2023.12.14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