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읍교회사기후록(총계담록, 1924)표지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흥지방청년연합회 회의록(1954)표지 |
고흥읍교회부인전도회 회록(1951) 표지 |
고흥의 최초 교회 설립과 독립운동가 목치숙
목치숙(睦致淑, 1885~1928)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1910년 고흥읍교회 첫 장로이기도 하다. ‘나무위키’에 보다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주목할 점은 고흥 최초의 교회에서 그의 민족에 대한 자각,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웠다고 하는 점이다. 송현강의 논문을 좀 더 인용한다. “고흥의 동학군이 전주성 점령을 위해 낙안으로 향하면서 몹시 뒤숭숭한 분위기의 1894년 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이눌서)와 드루(유대모)가 고흥을 방문한 10년 후의 일이다. 선교사의 두 번째 방문이 1905년 오웬(Owen, 오기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그해 9월 기존의 사역지 광주에서 고흥을 포함한 바다 끝 남쪽으로 사역지를 확장시킨다. 1905년 가을 오웬이 고흥 읍내의 신우구씨 한약방에 머물면서 전도하자, 신우구, 목치숙, 박용섭, 박무웅, 설준승, 이춘홍 등 6인이 화답을 한다. 모두 고흥의 향리 집단 즉 아전들이었다. 신우구(51)는 고을의 형방과 이방을 지낸 후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박무웅(52) 역시 이방과 형방을 역임한 토착 향리였다. 이중 가장 젊은 목치숙(20세)은 부친(목인범)이 아전이었으므로 향리 2세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해 신우구는 고흥의 3대 부자로 정평이 나 있었고 목치숙의 부친은 왕실 소유 토지였던 북어포장통의 이장(관리인)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고흥 최초로 설립된 교회가 1906년 9월(어떤 자료에는 1905년으로도 나온다) 신우구의 한약방에서 시작된 고흥읍교회다. 오웬을 따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1922년에야 한식 기와를 얹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다.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는 초기의 이들이 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 교회에 남아있는 문서에서 이같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는가이다. 송현강은 그의 논문에서, 이들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고흥지역 교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목치숙의 이력을 보면 1905년 전남노회 순천지방회 조사(助事,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 1919년 조선독립고흥단, 1920년 조선청년회연합회 고흥기독교청년회 회장, 1922년 동강지방청년회 총무 등으로 나온다. 송호철은 ‘고흥 기독교의 수용과 활동’(순천대인문학술원, 2020)에서 말하기를, 이들 향리층의 자제들이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의료사업과 야학 사업을 전개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설파해나갔다고 한다. 송현강에 의하면 1920년대 중반 고흥군에 모두 13개의 교회가 있었고, 1000여 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같은 신속한 교세 확장의 배경에 고흥 기독교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목치숙이 출옥한 후 1920년 여름 고흥 최초의 청년회인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맡았고, 1921년 사립 광명학원을 설립하여 60여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으며, 야학도 만들어 운영했던 이력이 이를 말해준다. 현재 고흥읍교회에서 보존하고 있는 문서에는 이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고흥읍교회사기후록(총계등록 1924)’안에 들어 있는 ‘고흥읍내 옥하리교회사기’에 보면, 1919년에 목치숙씨가 조사(助事)가 되었고 1921년 정태인 목사, 1924년 3월에 이기풍 목사가 취임하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이 문서는 이기풍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수 있다. 다만, 옥성득의 “한국기독교 형성사”(새물결플러스, 2020)에 의하면, 이기풍 목사가 제주 성내리 교회에서 1912년 12월 사경회를 마치고 예배당을 증축해 예배하는 것으로 나오는 점 등을 교차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기풍의 활동 내역도 목치숙 못지않게 중요하다.
남도인문학팁
고흥읍교회에 보존된 문서들의 가치
1905년 선교사 오웬 목사가 전도하여 시작했다고 알려진 고흥읍교회의 기록문서로 1924년으로 표기된 기록과 1951년~1975년에 이르는 총 9건의 문서자료가 남아있다. 붓으로 쓰거나 펜으로 써서 고문헌보다는 가치가 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구술사를 언급한 것처럼, 이제는 이들 문서의 가치를 평가하고 존중하는 시대가 왔다. 근대문화유산을 홀로 혹은 그룹으로 묶어서 지정한 사례들이 늘고 있다. 그에 비추어 보면, 남도의 초기 기독교 전파와 활동 내력뿐만 아니라 고흥지역 3·1운동 내력과 근대 민족교육 지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문서들이다. 지난 2019년 고흥읍교회, 소록도교회 등 5개 교회가 한국기독교 사적지(고흥읍교회 11호)로 선정된 것도 목치숙 등 3·1만세·민족계몽 운동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2024년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바뀌는 등 국가적인 문화유산 관리에 변화가 일고 있다. 기왕에 불교 유적 중심으로 문화유산을 지정해온 것은 불교 전래가 기독교보다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도 이제 역사적 궤적에 들었다. 천주교의 전래는 이승훈이 18세기에 로마 카톨릭 신앙을 처음 들여올 때로 잡는다. 개신교도 매클레이가 고종황제로부터 선교를 허가받은 기점으로 잡으니 벌써 140년이나 되었다. 흔히 민속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3대에 걸쳐 변하지 않고 지속해온 풍속이라고 말한다. 그러하니 기독교 문화유산도 국가지정 혹은 지자체 등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보호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역단위별로 기독교 문서를 전수조사하는 작업이 물론 이어지겠지만, 1924년으로부터 2024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고흥읍교회 문서 ‘총계등록’을 상고하는 것이 시대정신일 것이다.
이윤선 서남해안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