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창 이주림, 12송도, 한지에 수묵담채, 200×55cm, 2016 |
원창 이주림, 조춘1, 한지에 수묵담채, 70×40cm, 2016 |
원창 이주림, 조춘2, 한지에 수묵담채, 70×40cm, 2016 |
어이타 가고 울고 그리는 그 대를/ 심어 무삼할거나 헤~” 판소리 창자들 혹은 남도민요 전문가들이 즐겨 부르는 육자배기 한 토막이다. 이 노래는 시조(時調)로도 불리는데, <악학습령(樂學拾零)>에도 비슷한 가사가 실려 있다. 조선 영조 8년(1732)에 이형상이 펴낸 고려·조선 시대의 시조집으로 1,109편이 수록된 책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즐겨 부르던 노래라는 뜻이다. 살대는 날아가는 화살이니 가는 것에 비유하였고, 젓대는 대금 혹은 피리이니 소리 내어 우는 것에 비유하였으며, 붓대는 그리는 것이니 그리움에 빗대었다. 언어유희(말장난)이지만 수준 높은 경지다. 모든 잡초는 다 심더라도 대나무만큼은 심지 않겠다는 맹세를 노래한 것일까? 아니 그 반대다. 뻔한 물음으로 답을 내는 설의법(設疑法)으로 보이지만 사실 사무쳐 가슴 에이는 그리움의 반어법이 숨어 있다. 한없는 그리움, 향가의 제망매가로부터 고려가요 가시리, 아니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이르는 임에 대한 정조가 그러하다. 지극한 일에 대한 숭고함이랄까, 눈 내린 겨울 길을 첫발자국 내며 걷는 청초한 태도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정조가 대나무만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선비들이 즐겨 그리고 썼던 사군자가 그렇고 특별히 소나무가 그렇다. 이 글을 육자배기로 시작한 까닭은,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원창 이주림 작가가 고수해온 작업을 톺아보기 위해서이다. 내가 즐겨 쓰는 일종의 내드름 방식이다. 고려 이후 애창해온 저 노랫말에 기대어 말하자면, 붓대를 들어 그리는 그리움은 누구를 향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일까? 그가 평생을 고수해 온 그림 작업과 소명, 혹은 천명(天命), 예컨대 만해 한용운의 임이 조선이었다면 원창의 임과 그리움은 남도임이 틀림없다.
소나무에 입힌 원창(沅蒼) 이주림(李柱林)의 정조(情操)
원창의 소나무 그림은 우리네 전통에서 나왔지만, 전통과는 다르다. 청출어람이다. 애국가 가사에 나오듯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가 아니다. 조선 후기 민화의 유행에 힘입은 십장생(十長生)의 소나무도 아니다. 추사의 <세한도>를 닮은 듯하지만, 결코 홀로 서 있는 법이 없다. 나무들이 꿈틀거리고 있지만, 딱히 용(龍)의 비상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소나무껍질을 통해 용의 비늘을 형용하는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거의 일부를 제외한 그의 소나무들은 끼리끼리 숲을 이룬다. 서로 기대거나 보듬거나 지탱하며 서 있다. 김정호의 발라드 노래에 나오는 ‘돌아가는 저 길에 외로운 저 소나무’도 아니다. 쌍으로 겹으로 보듬고 기대고 있어 오히려 든든하다. 이 느낌의 배후에는 어깨를 교차하거나 기대거나 서로 마주 보는 개체들의 어떤 합일이 있다. 나는 이것이 원창의 그림에 깃든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소나무 자체가 가지는 의미, 그 지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세한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고향 해남마을의 당산 숲처럼 서로 얽힌 소나무들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세한도와 다르다. 이어령이 책임 편집한 <한중일 문화코드 읽기-소나무>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이나 중국의 소나무 그림은 산수화의 풍경의 하나로 그려져 있거나 혹은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성상에도 변하지 않은 선비의 절의를 나타내는 상징기호로 그려진다. 소나무는 노송이라고 해도 그 나무 등걸과 줄기가 결코 굵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의 후스마에(襖絵)에 그려진 소나무 그림들은 한결같이 한 그루이고 그 모습은 용의 몸통처럼 웅대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원창의 소나무 그림을 일본에 비교하여 설명하는 듯하다. 이 글을 통해 원창의 소나무가 한국적 특성을 드러내 준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여타의 소나무 그림과 결이 다르다. 추사의 <세한도>가 유교적 윤리나 규범에 대응되는 그림이라면, 원창의 소나무는 마을 당산 숲과 마을 사람들의 심성에 대응된다. 선비의 절개와 기개를 드러내면서도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수의 그림에 초야의 선비네 집일 듯한 가옥이 비칠 뿐, 대개는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연대의 소나무들이 그려진다. 서사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전통적인 화자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을 투사해 더불어 숲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넓디넓은 여백을 훑어내면 숨겨 둔 화자를 찾을지도 모른다. 주지하듯이 여백을 두는 것은 동양화의 보편적인 전통이다. 그래서 동양화를 여백의 그림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진만은 ‘근현대 한국 수묵 산수화의 특징’에서 이렇게 말한다. “근현대 한국 수묵 산수화가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정신을 작품에 이입하였지만 이를 화론(畫論)으로 정립하지 못했다. 단지 이들은 중국의 남종문인화의 정신을 전수받아 한국의 실경을 제작하는 데 이용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 화가들은 한국인의 사상과 정신이 이입된 근현대 한국 수묵산수화의 전통을 전수하며 한 차원 높은 한국화 정립에 힘써야 한다.” 좀 오래된 얘기이긴 하지만, 원창이 바로 이러한 지점들을 넘어섰다는 측면에서 인용 가능한 언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원창은 수묵산수화로서의 한국적 풍경을 전수하고서도 애오라지 숲으로 수렴하였다. 그것도 남도를 지향하였다. 그의 그림을 대하고 있노라면 ‘지조의 연대’, ‘절개의 보듬음’, ‘어깨 겯고 나아가는 숲’ ‘여백에 스민 심사’ 등의 카피가 떠오른다. 수묵화의 전통을 바탕 삼되, 전통에 갇히지 않은 자유, 원창의 소나무는 이미 연대의 화론(畫論)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남도인문학팁
원창 이주림의 그림 세계
육자배기 ‘백초를 다 심어도’에서는 ‘가고 울고 그리는’ 대를 결코 심지 않는다 하였다. 하지만 원창은, 가고 울고 그리울지라도 평생 붓대 하나 들고 그 그리움들을 쌓아왔다. 백초보다 더 많은 그리움을 심어온 셈이랄까. 설의법이 아닌 역설법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곡절(曲切)하게 쌓아온 것이다. 원창의 이 지극한 심사는, 남도라는 고향과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의 정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에 갇히지도 않는다. 주지하듯이 정조(情操)는 진리, 아름다움, 선행, 신성한 것을 대하였을 때 일어나는 고차원적인 복잡한 감정이다. 지적, 도덕적, 종교적 미적 정조 따위가 있다. 사실 나는 민화(民畵)를 추적하던 차에 원창을 만났다. 채색화로서의 민화가 전통 산수화, 혹은 풍경화의 이데올로기를 박차고 나온 그림이라는 점을 알아차리면서 거슬러 올라 수묵화의 깊은 경지를 알지 않으면 민화를 얘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원창의 그림 세계를 오랫동안 묵상해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원창 이주림은 해남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스타일은 대개 천재들이 일필휘지하여 작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닮았다. 미친 듯이 그리고 쓰러져 소일한다. 내력을 보니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과 특선만 해도 17회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최연소 특선은 물론 다수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를 역임하는 등 광범위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청사 메인 퍼포먼스 등 중국, 호주, 중앙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즉석 행위예술을 포함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세계한글문화 대축제 대상, 올 투게더 아시아 한류미술공로상, 인도네시아 솔로왕 훈장 등 화려한 이력도 있다. 현재 목포에서 작업 활동에 매진하고 있으며, 유럽, 중국, 중앙아시아 등 해외 전시를 준비 중이다. 그가 고수해온 전통의 정조, 남도에 발 딛고 작업하는 심사를 애오라지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