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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읊은 매화시이다. 매화를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로 알려져 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골짜기는 필시 고려말의 혼란기를 뜻하는 것이다. 혼란의 구름이 머물러 있으니 눈 속에 피는 설중매를 마주할 길이 없다.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라의 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석양에 홀로 청청하게 서 있었다는 행간을 읽으면, 깊은 눈 속에 매화가 피어있듯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와중의 격변을 그려볼 수 있다. 그저 눈 속에 피는 한 송이 매화를 읊은 것이 아니다. 이색이 누구인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
편집에디터2022.02.03 17:14범 내려 온다. 범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발이 넘고 동개같은 뒷다리, 전통같은 앞다리, 쇠날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 헤치며 주홍입 떡 벌리고 자라 앞에 가 우뚝 서서 흥앵흥앵 하는 소리 산천이 뒤엎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 움츠리고 가만히 엎졌을 때. 이날치 밴드가 불러서 일약 국민가요가 된 '범 내려온다' 대목이다. 판소리 수궁가 중 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임방울이 불러 국민가요가 ...
편집에디터2022.01.27 15:05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백두대간은 학문 각 분야의 관심과 연구를 통섭적으로 아우르는 '백두대간학'으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최원석, 산의 인문학,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으로). 이는 지난 30년 동안 인문, 사회, 자연과학 각 분야에서 백두대간 관련 논문과 보고서, 단행본 등이 무려 1,500여 편이나 나왔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문제점을 극복하며, 통일시대에 남북한 학생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지리교과서 및 백두대간 지명사전, 백두대간 지도 편찬, '백두대간학'으로의 발전 등...
편집에디터2022.01.20 16:24고려뱃길 시험탐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통신사선. 이윤선 흑수양(黑水洋)은 북쪽 바다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빛은 진한 먹처럼 검은색이었다. 갑자기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모두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뿜어내는 것이 우뚝 솟은 만산과 같고, 밤이 되면 파도 사이가 불처럼 밝게 빛난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밝은 해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배가 내려가 파도 밑에 있을 때 전후의 수세를 바라보면 높이 하늘을 가리며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거리는 숨만이 겨우 남아있어 쓰러져 구토하고, 먹은 음식(粒)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요 위에 피곤해 누워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방을 높이 올려 구유(槽)와 같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울어져 이리저리 굴러 몸을 다치게 된다. 이 때에 몸이 만 번 죽을 수 있는 고비에서 벗어나길 바...
편집에디터2022.01.13 16:242021. 11. 21. 광주광산농악 한마당. 이윤선 한강의 끝자락 조강포에서 터울림을 한 것이 4년 전이다. 주지하듯이 조강포는 마금포, 강령포와 더불어 한강 하류의 3대 포구였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염하(鹽河)가 만나 한길을 이루고 서해로 접어드는 물길이다. 전라 충청의 모든 물류가 한양으로 나들던 길목이요 대중국 교류의 대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쉬었다가 한물을 올라가면 서울 마포다. 지금은 철책으로 막아버려 북쪽 땅끝이 되어버린 곳이다. 2018년 당시 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풍물활동을 하던 노나메기팀과 합류하여 조강포 나루표지석 앞에서 신년 마당밟이를 하였다. 땅을 울리니 터울림이요 바람을 더불어 울리니 공명(共鳴)이었다. 아시아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과 만나 내가 제안을 하였고, 노나메기 대표가 응대하여 이루어진 쾌거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조강포를 울렸던 쇠북소...
편집에디터2022.01.06 14:39광주 동곡박물관 전시. 이윤선 태초에 천지가 혼돈이었다는데요/ 하늘에서 청이슬 내리고 땅에서 흑이슬 솟아나/ 음양 상통 합수되어 만물이 생겨났드랍니다./ 천황닭 목을 들고 지황닭 날개를 치니/ 인황닭 꼬리쳐 울어 갑을동방 먼동이 터온 게지요./ 그뿐이것습니까. 궤짝에서 태어난 알지 말입니다./ 구름 속 황금상자 자색구름 타고 내려오는디/ 아, 순백의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호공이 아뢰니 왕이 친히 나가 상자를 열었는디/ 떡두꺼비 같은 아이가 울고 있어 알지라 불렀다지요./ 온 세상 물에 잠기게 되었을 적 계봉 꼭대기/ 딱 닭 한 마리 앉을 자리 남아있었기에 닭제산 아닙니까./ 닭벼슬 관모 자라 주작되고 봉황되었는디/ 어디 삼족오가 따로 있고 백제금동향로가 따로 있겄습니까/ 사우 자시라고 장모님 잡는 닭이 주작이고 삼족오인게지요./ 경주 천마총 수십 개의 계...
편집에디터2021.12.30 16:20판소리고법 김명환.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년 흥미로운 뉴스가 한 일간지를 장식했다. 크라운해태제과, '판소리 100인 떼창' 세계 기록 인증이라는 한겨레신문 기사였다. 윤영달 회장과 임직원 100명이 함께 부른 판소리 '사철가' 떼창(합창)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100인의 판소리 떼창은 윤회장이 도창(導唱, 창을 이끄는 사람)으로 판소리 단가 첫 도입부 를 선창하고 임직원 100명이 각자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형식이었다. 사철가 떼창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사실은 100명의 고수들이 각자 북을 잡고 앉아 행한 고법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간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이 국악에 쏟은 정성과 관심이 이런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수(鼓手)는 무엇이고 고법(鼓法)은 무엇인가. 판소리는 신재효가 정리한 '광대가'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고...
편집에디터2021.12.23 16:20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조사. 이윤선 "무격(巫覡)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무리 지어 모이고, 춤패와 노래패를 나열시키고 돌아다니며 제사를 받드는 것도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 그 영신(靈神)의 덕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다." 「순창성황사적현판」의 내용 중 무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무격(巫覡)은 무당(여자)과 박수(남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성황당의 의례에 많은 무당과 박수들이 모여들었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 성황제 의례 때문에 모였을 터인데 궁금한 것은 이들의 역할이다. 춤패와 노래패는 춤을 추고 노래했을 것이므로 그 기능이 짐작되는데 무격의 역할이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제사를 받드는 것도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에 나타나는 정보는, 당시에도 제사가 왕성하게 연행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영신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편집에디터2021.12.19 14:31낙지의 부화, 줄탁동시(啐啄同時)에 기대어 지난 11월 26일 해남 신활력플러스추진단 강당에서 괄목할 만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름이 '땅끝 제철 진미 파티', 현재 5회째, 매달 한 번씩 연다. 11월 주제가 '낙지'였다. 남도 어느 지역이고 다르겠는가만 해남은 특히 사시사철 먹거리가 그치지 않고 순환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좋은 땅에서 좋은 먹거리가 순환되니, 제철의 맛있는 음식 나눔이라는 게 당연하고 또 마땅한 발상일 것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수준이 아니다. 모이신 분들의 생태적인 태도와 의지, 또 실천의 이력들을 보니 바로 이것이 지역을 살리는 첩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선 김에 낙지에 대해 몇 마디 축하 말씀을 드리고 왔다. 낙지를 소재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 늘 인용하는 말들이다. 낙지 한 마리를 먹으면 쓰러진 소도 벌떡 일어난다는 말. 남도 ...
편집에디터2021.12.09 15:37해남윤씨종가 미인도 가체 외손자의 태내머리카락으로 만든 태모필(문상호) 배냇머리붓(胎毛筆)에서 모유필(母乳筆)까지 "연하디연한 세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자란 머리털로 붓을 만들었습니다. 짜박짜박 걸음걸이 할 때부터 그 내력을 그렸습니다. 길고 긴 곰할머니의 동굴, 마늘냄새 쑥냄새 진동하는 흑암의 자궁으로부터 빛과 어둠이 나뉘고 궁창이 나뉘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와 별들과 새들과 육축들과 남자 사람 여자 사람이 태어나서 소멸하기를 거듭한 그림 말입니다. 하지만 내 칠하는 문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을 한지 삼고 쌀뜨물 먹물 삼아 칠하기 때문일까요. 무수히 많은 글자가 셀 수도 없는 이야기가 구름처럼 보프라지다가 엉기다가 하기 때문일까요. 태모필(胎毛筆) 일필휘지 그은 선들은 흩어져 구름이 되고 칠한 색들은 시나브로 무색이 되었습니다. 빛 가운데로 나를 밀어...
편집에디터2021.12.02 15:17대지의 노래 연주자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 난 것은 임뿐이라~ 보고 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 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부모 공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유장한 선율이 광주전통문화관 서석당을 잔잔하게 울렸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쑥대머리' 대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율이 마치 시조와도 비슷하고 우리 전통의 가곡, 가사와도 비슷하다. 반주악기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악기편성 가믈란이다. 우리의 징과 비슷한 악기(공이라 한다)를 작은 것에서 큰 것 순으로 놓고 치는 주물 악기는 물론 우리의 고대 북을 닮은 듯한 너비가 기다란 북, 우리의 편경이나 편종을 연상하게 하는 크고 작은 악기들의 편성이 이채롭다. 우리로 치면 '궁중음악'이나 '삼현육각 잡힌다'라고 하는 악기편성을 닮았다. ...
편집에디터2021.11.25 13:52나주 동강 옥룡마을 할머니들의 한다리만다리. 이윤선 "한다리 두다리 거청대청/ 어록저록 막대 짚고 건네가/ 느그 삼촌 어디가 지장밭에 총 노로가/ 까투리 한나 투드렁 퉁 땡" 2002년 한 해 동안 목포대학교신문에 내가 연재했던 '영산강 민중생활사' 중 한 꼭지다. 명산나루 건너고 잿빛 물비늘 따라 영산강을 치올라 가면 강이 막힌 듯 다시 이어지는 곳, 곡강의 끄트머리 봉추와 옥정리, 장동리, 그리고 더 멀리 곡천리 등이 크게 에워싸고 있는 곳이 있다. 그 가운데 마을 몽송리에 들렸다. 90이 훨씬 넘거나 혹은 80객, 아니면 70객이다. 여기서 60객은 그야말로 청춘이다. 당시 영암댁으로 불리던 박청명(78세)씨, 가장 총(聰)이 좋은(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는 때때로 기억나는 옛노래들을 부르며 유년의 창을 두드리곤 했다. 그녀에게 노래는 타임머신이었을까. 열여...
편집에디터2021.11.18 16:14중국 연변 창극단 출범식. 이윤선 전통적인 판소리나 그 형식을 빌려 만든 가극(歌劇)을 창극(唱劇)이라 한다는 점 지난 연재에서 소개해두었다. '소리극', '뮤지컬' 등을 포괄한다. 하지만 '판소리극'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판소리를 기저 삼고 있는 노래극인데 왜 판소리를 걸어 호명하지 않았을까? 판소리 발생 300여년, 창극 발생 100여년, 수많은 호명들이 이 장르를 수식했다. 민요창극, 악극, 가극, 가곡, 국극, 여성국극 외에 딸딸이, 포장극장, 나이롱극장, 약장수극장 등을 포함 시킬 수 있다. 그 시초에 협률사라는 100여 년 전의 구성물이 있다. 20여년 전 내가 진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노래극을 만든 적이 있다.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졸고, 「민요창극을 통해서 본 지역문화콘텐츠 포지셔닝-진도에 또 하나 고려 있었네를 사례로...
편집에디터2021.11.11 16:43언제부터 창극(唱劇)이란 장르가 생겨났을까? 창극은 문자 그대로 창(唱)과 극(劇)의 복합 장르다. 창은 판소리를 가르키는 말이고 극은 연극을 말한다. 판소리로 하는 음악연극이라는 뜻이겠다. 오늘날로 말하면 뮤지컬이니 음악극이니 하는 따위가 이 범주에 속한다. 20여년 전 내가 진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노래극을 만든 적이 있다. 극본은 고 곽의진 작가에게 맡기고 노래는 유장영 감독에게 맡겼는데, 내 의도는 판소리가 아닌 진도의 민요를 매체 삼아 연극을 꾸며보자는 것이었다. 방송 등 언론에서...
편집에디터2021.11.04 15:31사람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넓은 바다를 날아야 모래 위에서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들이 오가야 그것이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있네. 이것은 노래일까 시(詩)일까? 음악일까 문학일까? 아니면 음악이나 문학이라는 장르일까, 사회현상으로서의 행위일까? 국립국악원에서 펴내는 '국악누리'에 올해 1년간 연재를 했다. 그 마지막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독자들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나 자 남도발라드 가수 김정호 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위 밥딜런의 노래, 아니지 시(詩)들을 줄곧 묵상해왔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를 노래로 호명해야 하나, 문학으로 호명해야 하나. 마르셀 그라네는 이렇게 얘기한다. "...
편집에디터2021.10.28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