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에서 다시래기 연기로 좌중을 울리고 웃기는 고 강준섭 , 김애선 부부 |
다시래기 연기중인 고 강준섭 명인-진도군제공 |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 내가 세운 사회극 이론 중 하나다. 창조한 조어가 아니다. 내 고향 어르신들이 늘 하던 말씀을 빌린 것이다. 욕설이 아니다. 상가에서 항상 훼방을 놓거나 일명 ‘지랄’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까닭을 빗대 말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의도한 것도 아니다. 상가에서의 이 캐릭터는 거의 필연적이다. 이런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꿔서라도 반드시 등장한다고 해서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라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이 상장례의 연극 만들기 구조이며 이 캐릭터가 일종의 악역(안타고니스트, 대립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2018, 민속원)에서 기본적인 개념을 주장해두었다. 갑자기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사회적 손실의 심리적 보상이나 보완 기제로 극 만들기가 이루어졌고, 이 극의 서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에 대적하는 대립자가 반드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가 아니라면 서사를 가진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악역이 상장례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수천년 이어온 전통이다. 누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사회극의 원형(아키타입)이랄 수 있다. 상례의 필연적 등장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꿔라다고 하는 지랄’의 캐릭터다. 다른 하나는 윷놀이다. 윷놀이를 상례 중 하나로 주장한 지 오래되었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겸사겸사 다음에 또 풀어 쓴다. 스턴버그와 가르시아가 함께 쓴 『사회극-원리와 적용』(학지사, 2012)에 보면, 사회극은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동의한 상황을 행위화 하는 집단행위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이 극을 통해 사람들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슈를 해결하며, 가치관을 명료화한다는 것이다. 다만 사회극은 사회문제를 토론하기보다는 현재의 역할에서 나와서 행위로 탐색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를 풀어 탈놀이니 마당놀이니 하는 전통극의 원형적 구조로 읽어내고자 했고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우리에게 깊숙하게 내면화된 연극 만들기의 원리로 해석해왔던 것이다. 넓게는 사회극이고 좁게는 의례극, 전통극이다. ‘꿔다가도’ 등장시키는 이 출연자가 없으면 ‘풀이’의 결말로 진행하지 못한다. 이것은 의례나 제사의 기본구조이기도 하고 이른바 ‘이야기’의 형성 전제이기도 하다. 차차 풀어 소개한다.
진도 지산면 앵무리 날받이굿, 송가인과 마을사람들-이윤선 |
남도인문학팁
조동일의 대등창작과 창조주권론에 기대어
지난 몇 년 조동일이 말한 대등창작과 창조주권론에 대해 사숙(私淑)했다. 십수 년 전에는 그가 창발한 생극론을 여러 지면에 인용한 바 있다. 근자에는 그의 사상적 정점일 것으로 보이는 대등론을 풀어보고 있다. 대등창작, 창조주권론 모두 탁월한 이름짓기다. 그는 한국문학사, 세계문학사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본질과 구조에 대해 설파했고 특히 탈춤을 통해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의 세 가지 기본 원리를 주장했다. 지난주 채희완이 중심이 되어 벌인 마당극 포럼 기조 대담의 일단을 옮겨둔다. “지금은 이런(탈춤을 말함) 대등창작을 밀어내고 차등창작이 득세했다. 극작, 연출, 공연, 관람이 담당자나 작업 순서에서 엄격하게 구분되고, 앞의 것이 뒤의 것 위에서 군림하는 차등창작이 세계를 휩쓸어 예술사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이한 재주를 자랑하는 전문가가 횡포를 자행하고, 최하위의 관람자 신세로 전락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조주권이 유린된다. 극작, 연출, 공연, 관람이 하나인 대등창작의 원리를 재현하는 투쟁을 일제히 일으켜야 한다.” 너무 강하게 얘기한 듯하지만 시선 자체가 옳다. 잘난 사람들이 앞서 걷는 것이 차등창작이고 못난 사람들이 뒤따르는 것이 대등창작이다. 평등이라는 개념과는 결이 다른 얘기다. 비유하자면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남녀를 평등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대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그간 써오던 ‘호혜 평등’이라는 언설을 ‘호혜 대등’으로 바꾸었다. 대등의 제시야말로 시대의 진전을 바라보고 장차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자각한 이정표이다. 나는 2009년에 ‘민요의 혼자 부르기와 여럿이 부르기에 대하여-진도의 유희요를 사례삼아-(한국민요학 26집)’에서 선창자와 후창자, 메김소리와 받음소리, 추임새로 남은 공동창작자 등에 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그 문제 제기와 더불어 상례극 전반의 서사를 완성하는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을 주장해왔다. 상례 전반을 전통극 혹은 사회극이라 했을 때, 주인공과 대립인물의 갈등과 해소는 굿의 기본적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춤이나 협의의 다시래기가 정해진 각본과 대사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라면, 상가판의 ‘꿔다가도 하는 지랄’은 내면화된 혹은 무의식적 레퍼토리에 의해 구현된다. 결말을 알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고 그 와중의 ‘어루기’와 ‘겨루기’에 의해 예술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 정점에 시나위라는 기악합주가 있고 판소리라는 성악이 있다. 희생양을 매개 삼는 번제(燔祭)나 인신공희가 향불 올리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제사를 포함한 우리의 전통적인 극의 대등창작 원리에 ‘꿔다가도 하는 지랄’을 하는 캐릭터가 왜 거론되어야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사회극이 지향하는 목표나 목적을 망실하고 제멋대로 까부는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청소년기에 거론되는 지랄총량의 법칙과 더불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원리이자 이론이다. 의례극, 전통극, 사회극이라는 때와 장소와 배경이 명확한 것이 내가 주장해온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