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한겨레출판, 2003, 160쪽)의 한 장면이다. 지난 칼럼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論)’을 설명한 자료라 해도 무방하다. 왜 전통극 혹은 사회극을 통해 우발적이고도 즉흥적인 캐릭터들의 참여와 행동들이 수용되었는가 말이다. 방탕하고도 우발적인 과잉행동들이 가진 행간의 의미가 전 세계 고대사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때 그 의식에 꼭 필요했던 캐릭터이기에 만약 없으면 꿔다가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진도사람들은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라고 정의해 왔다. 진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상장례 서사를 완성시키는 세계적 보편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히 ‘지랄론(論)’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논의를 좀 더 풀어둔다. 이른바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김두식이 그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에서 내놓은 이야기라는데, 굳이 그 연원을 따지자면 질량보존의 법칙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꿔다가도 하는 지랄’은 총량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랄이라는 말은 본래 ‘간질(癎疾)’을 이르는 용어였으나 훨씬 확장되어 통용되었다. 국어사전에서는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정의한다. 학술적인 용어나 방송용어가 아니고 욕설이기에 선뜻 입 밖에 내기가 불편하지만 기피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다.
지랄의 총량과 행복의 총량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전과 후에 물질의 모든 질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원칙을 말한다. 1774년 라부아지에가 확인하였고 이것이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한다. 물론 고립된 계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되지 않는 한 질량 에너지를 포함한 계 내의 에너지 총합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삶에 대입한 것이 이른바 ‘지랄총량의 법칙’일 게다.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와 이치 또한 이 총량의 법칙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예가 다이어트와 관련 짓는 먹는 것의 총량이지 않을까 싶다. 폭식이나 먹토(음식을 스스로 역류시켜 토하는 행위)가 건강에 끼치는 해악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폭식이나 폭음이 한 날의 행복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비만과 질병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이론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총량은 어떠할까? 평생 누려야 할 행복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행복을 적절하게 나누어 써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구자영과 서은국이 쓴 ‘행복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믿음과 주관적 안녕감’(한국심리학회지, 2007)을 보면 행복에 대한 내재이론이 나온다. 나와 남들 사이의 행복의 총량과 내가 평생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총량을 포함한 새로운 개념이다. 이 분석결과에 의하면 행복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다고 한다. 행복의 총량이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에 위배 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다. 근자에 회자되는 학교 폭력, 사회 폭력, 나아가 국가폭력 등의 사건들을 접하노라면 부쩍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과연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말이다. 그간 회자된 지랄총량의 법칙은 대개 어린아이나 사춘기를 맞이한 청소년들의 돌발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주입식 교육에 매몰된 우리 교육 현실을 진단한 사회적 장치랄까. 가능하면 이런저런 훼방도 놓고 뛰어놀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 말이다. 반항기로 불리는 청소년기에 치러야 할 지랄을 억제하면 성인이 되어 그 지랄을 떨 수밖에 없다는 경계 심리가 작동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총량의 분석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랄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도사람들의 언술, ‘꿔다가도 하는 지랄’은 이와 다르다. 상장례 중 일군의 학자들이 ‘반의례’라는 용어로 호명했던 이른바 서사 만들기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프레이저의 해석을 거듭 상고한다.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은 숲이 푸르게 자라게 하고 싱싱한 풀이 돋게 하며 밀이(쌀이) 싹트게 하고 꽃이 피어나게 하는 주술이다. 나뭇잎으로 감싸거나 꽃으로 장식한 배우들의 결혼이 숲의 정령들의 실제 결혼과 흡사하게 ‘연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의식에 수반하는 방탕한 행동이 우발적인 과잉행동이 아니라 한때 그 의식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왜 상장례 극에서 안타고니스트를 꿔다가도 등장시켰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지랄총량을 넘어서는 법
주로 사춘기나 청소년기를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는 지랄총량의 법칙은, 우리 아이들을 보다 자유롭게 뛰어놀게 한다는 취지에서 고안되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원리이자 이론이 되려면 일종의 반항과 일탈과 자유스러움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피드백되는가를 따져 묻고 이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폭력이 정당화되는 데 지랄총량의 법칙이 거론될 수는 없다. 사회 폭력이 정당화되는데 질량 보존의 법칙이 거론될 수는 없다. 더구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사회적 손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국가폭력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참담할 뿐이다. 지랄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법칙은 폐기되어야 한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이를 전거 삼아 각종 학교의 시스템이나 교육 방향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말해 두었다. 전통극이나 사회극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의례극, 전통극, 사회극이라는 때와 장소와 배경을 명확하게 하여 공생체가 떠안게 된 상실이나 위험, 장차 이르게 될 위험을 극복해가는 것이 내가 주장해온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이다. 우리 사회 전체를 하나의 총체극이라고 한다면 청소년기에 떠는 이른바 지랄을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조건으로 꿔다가 실행할 수 있는가 말이다. 제 때에 지랄을 떨지 않고 청장년이 되어서나 혹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지랄을 떨게 되면, 우리가 지금 목격하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한 나라의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자리임에랴. 상장례극의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 내면화된 의미를, 나아가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학습된 이치를 거듭 살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