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일제 신사에 맞서 북장구 꽹과리 울리던 거문도 민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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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일제 신사에 맞서 북장구 꽹과리 울리던 거문도 민초들
352.거문도 고두리영감제(祭)
원시 문화의 하나인 강강술래가 이순신에 의해 활용되듯이 1900년 초 세워진 삼도신사에 대응했던 거문도 사람들의 마음과 이후 그것을 재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주목하자
  • 입력 : 2023. 06.29(목) 12:37
2023고두리영감제 풍어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023 고두리영감제 풍어제2-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거문도 안노루섬-이윤선 촬영
고두리영감바위 제단-이윤선 촬영
고두리영감바위-이윤선 촬영
삼도신사가 있던 자리와 고두리영감제가 열리는 안노루섬-이윤선 촬영
일제강점기 거문도 곤비라신사(뒤편) 최길성-일본식민지와 문화변용-한국, 거문도-중에서 캡쳐
어느 날 거문도 서도 덕촌 마을 해변으로 바위 하나가 떠밀려 왔다. 무심코 바다로 떠밀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다로 떠밀수록 다시 해안으로 밀려왔다. 필시 연유가 있겠다 싶었다. 촌로들이 모여 의논했다. 틀림없이 상서로운 조짐 아니겠는가? 궁리 끝에 이 돌을 거문도 남쪽 관문인 ‘안노루섬(內獐島)’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마침 고기가 안 잡혀 어민들의 고민이 깊었던 터였다. 거문도 안팎 바다에 좋은 어장이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태졌다. 안노루섬 꼭대기에 당집을 짓고 매년 음력 정초와 추석에 제를 지냈다. 영기(令旗)를 한 쌍 만들어 세우고 진행했다. 영기는 군령(軍令)을 전하는 데 사용하던 깃발이다. 사방 두 자 정도의 천을 삼각형으로 잘라 만들고 바탕에 영(令)이라는 글자를 써넣는다. 줄다리기나 해안지방의 마당밟이 등에서 지휘 신호를 하거나 풍물놀이에 앞장서는 사람이 사용한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중단과 연행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수협에서 주관하여 풍어제로 지낸다. 매년 4월 15일이다. 전승해오는 거문도 고두리영감제(祭) 내력이 이것이다. ‘고두리’는 제주도 등지에서 고등어 새끼를 부르는 ‘지역말’이다. 따라서 ‘고두리영감’은 ‘고등어신(神)’을 상징하는 호칭이랄 수 있다. ‘고도리영감제’라고도 한다. 고등어잡이가 성행했던 거문도의 풍어 기원과 관련된 신격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거문도를 다니며 이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침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작은섬 시리즈 답사차 들른 김에 진호신 연구관의 도움을 받아 원용삼 옹(87세, 여수 거주)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분 및 물심양면 제보와 안내를 해주신 거문도 주민 여러분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안노루섬 당집과 일제의 곤비라(金毘羅) 신사



거문도는 크게 동도(東島), 서도(西島), 고도(古島)로 나눌 수 있다. 고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공간이기에 왜도(倭島) 혹은 왜섬이라 했다. 1900년 초 거문도로 집단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이름을 고도(古島)로 바꾸었다. 일본인들은 거문도 남쪽 항구의 관문이랄 수 있는 들목거리 해안 언덕에 삼도신사(三島神社)를 짓고 오오카미(天熙大神)와 곤비라(金毘羅)신을 모셨다. 삼도(三島)는 거문도의 옛 이름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복귀할 때 전적으로 장보고와 그 선단의 도움을 받는다. 그 항로에 서해 여러 도서와 지금의 진도 조도면에 소속된 거차도, 여수시에 소속된 안도(이곳이 거문도라고 주장한다)등이 있다. 이 부분은 할 말이 많으므로 나중에 따로 풀어 쓴다. 곤비라(金毘羅)는 불교의 도깨비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다. 여러 야차(夜叉, 흔히 불교의 도깨비라 한다)를 거느리고 불법(佛法) 지키기를 서원(誓願)한 야차왕의 대장이다. 이것이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불교적 신으로 추앙되어 일본에서는 어업의 신으로 모셔진다. 삼도신사는 태평양전쟁이 화염을 뿜던 1942년 7월 8일, 마을 아래편으로 옮겨 다시 크게 짓고 ‘거문도신사’로 이름을 바꿔 부른다. 지금의 면사무소와 경찰서 자리다. 신사 앞에 세우는 도리이(烏居)는 일본의 야마구치현에서 가져왔다. 정월 1월 1일 신정, 5월 10일 여름 축제, 8월 15일 일본 조상숭배의 날, 12월 8일 대동아전쟁 선포 기념일 등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사람들도 동원되었다. 주지하듯이 신사(神社)는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의례 공간이다. 내가 궁금했던 점은 이설 전, 1900년 초부터 1942년까지 곤비라신을 모신 삼도신사의 남동쪽 해안 바로 앞에 안노루섬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찍어온 사진을 참고하면 짐작하겠지만, 바다를 경계로 서로 마주한 거리가 불과 50여 미터, 넉넉하게 말해도 100미터 남짓이다. 일본이 가장 신성시하는 삼도신사 정면의 바위섬에 마을 제사의 하나인 고두리영감 당집을 허용했을까? 이 의문은 거문도의 역사를 꿰뚫고 있다고 알려진 원용삼 옹과 인터뷰하면서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고두리영감 당집이 생긴 것은 1919년경일 것이다. 원세학(元世學, 1858~1938)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듯하다. 거문도 초대 면장이다. 1900년 초 일본인들이 거문도에 들어와 삼도신사를 짓고 자기들의 신을 모신다고 하니 거문도 사람들이 가만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도(왜섬)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였고 마주 보는 방향이 덕촌리다. 원세학을 비롯한 덕촌마을 촌로들은, 좁은 섬에서 노골적으로 항일투쟁을 할 수 없으니 우회적으로라도 그들에게 대항할 방안을 강구하자고 논의했다.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고두리영감제의 탄생 내력이다. 바다로 떠밀려 온 바위 전설은 당시 덕촌의 촌로들이 고안한 이야기라고 한다. 덕촌리의 뜻있는 이들이 극비리에 고안한 것이어서 일제강점기 내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오로지 이 이야기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도신사 정면에서 고두리영감제를 지내며 징과 꽹과리를 울리고 북장구 치는 일을 허용한 것은 원세학이 면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랬을까? 6.25때는 경찰들이 안노루섬 고두리영감당집을 표적 삼아 사격연습을 했다는 전언도 있다. 그러다가 사라호 태풍때(1959년 9월 15~18일) 당집이 아예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떠밀려 온 바윗돌을 제단에 얹은 형태로 재구성해두었다. 여러 정황을 참고해볼 때 고두리영감 이야기를 전적으로 새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해와 남해 섬지역에 예컨대 돌배나 궤짝, 불두(佛頭) 등 으레 이런저런 표착설화가 전승되어오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던 이야기를 당시의 항일 상황에 맞춰 덕촌마을 촌로들이 재구성했을 개연성이 높다. 역사는 늘 변하고 재구성된다. 마치 원시 문화의 하나인 강강술래가 이순신에 의해 활용되듯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1900년 초 세워진 삼도신사에 대응했던 거문도 사람들의 마음과 이후 그것을 재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주목하는 것이다.



남도인문학팁

곤비라신사에 맞서던 거문도 사람들의 마음

원용삼 옹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들어진 이야기, 항일 운동의 다양한 방식들, 때로는 현재를 미화하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전의 것들을 재구성하여 현재의 의미들을 덧입히는 지역의 전설 만들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계해야 할 점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해명할 필요가 있다. 고두리영감제 이야기는 원옹의 주장처럼 1900년 초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고, 더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곤비라신사 전면의 안노루섬에서 매년 정초 북장구 꽹과리 치며 당제를 지내던 풍속이 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삼일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경부터 말이다. 이전 칼럼에서 거문도의 인어전설 ‘신지끼’를 쓰고 나서 해명해두었다. ‘산지기’ ‘묘지기’ ‘땅지기’ 등과 같이 ‘신(神)지킴이’라는 뜻이라고 말이다. 이 설화도 다르지 않다. 원옹의 주장을 전부 다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고두리영감제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풀린다. 이를 주도했던 덕촌마을에는 이와 별개로 마을 당제가 전승되고 있다. 한 마을의 의례인데도 두 의례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에 원옹의 주장과 단서가 있다. 그래서다. 총칼 들고 전면에 나서 대항하지는 않았지만, 신사터에 대응하여 북장구 꽹과리 울리던 민초들의 여린 마음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신사의 면전에서 조선의 악기들을 울리며 당제를 지낸 사례가 전국에 또 있나 모르겠다. 거문도 안노루섬 고두리영감제와 당터를 하나의 항일유적 혹은 항일 운동으로 검토해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