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김시스터즈 김숙자 방한 때, 목포에서 필자와 함께 |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뉴시스 |
오리지널 K-팝(Pop)스타는 누구일까? 라스베가스 스토리(Library District)에 소개된 2023년 5월 4일 기사 “Sue Kim of the Kim Sisters-The Original K-Pop Stars” 얘기다. 슈킴은 그룹리더 김숙자이고 김시스터즈는 한국 최초 미국 진출 걸그룹이다. 네온뮤지엄(Neon Museum/blog)의 2023년 3월 15일자 History Month 기사에서도 60여 년 전에 미국으로 진출한 한국의 첫 그룹이라며 제목을 오리지널 K-팝(Pop) 스타라고 뽑고 있다. 우후죽순 세계로 뻗어 나간 한류(韓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접두어 K를 붙여 각종 장르를 이르는 용어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를 말하는 일종의 키워드가 되었다. 불과 1세기 전, 나라 잃고 설움 겪다가 종족분쟁의 참화까지 견뎌내며 버텨온 우리가 이제는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된 셈이랄까. 한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그 과정이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왜색이니 양색이니 따위로 비난하거나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함에도 성과는 성과대로 성찰은 성찰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류(韓流)의 확장과 K-팝(Pop), K-컬쳐
K-팝은 좁게 말하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한 혹은 진출하고 있는 한국의 가요를 말한다. 영어 ‘Korea Pop’, 풀어 말하면 ‘한국의 가요’다. 대중음악 산업 전반을 이르는 말로 통용되었지만 음악산업을 넘어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생산되고 유통되는, 특히 동아시아 권역에서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드라마, 영화, 게임, 만화 등을 비롯해 한식, 한글, 캐릭터 심지어는 한국의 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 재구성되었다. ‘K-컬쳐’ 혹은 ‘한류(韓流)’로 통칭한다. 2020년에 문화체육부에서 ‘신한류 진흥정책 추진정책’을 발표한 후 K 접두어가 남발되고 있다. 코로나 정국에서 유행한 K방역을 비롯해 K패션, K피쉬, K포럼, K세일 K코스메딕 등 과도하다. 민간에서 시작하였던 한류가 국가적인 정책으로 확산되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한류가 드라마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1990년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H.O.T, 서태지와 아이들, 동방신기, 빅뱅, 소녀시대 등 무수한 흐름이 있다. K-팝의 시작 자체가 2,000년 곧 새천년 전후로 형성된 셈이다. 이때까지는 동아시아적 한류였다. 이후 방탄소년단이나 걸그룹의 활약에서 보듯이 세계로 나아갔다. 가히 신한류의 시대다. 우리말 한류(韓流)보다 ‘K-팝’으로 호명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국제적 고유명사가 되었다. 2012년에 세계를 강타한 강남스타일은 k-팝의 폭발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018년부터 3년 연속 빌보드 1위를 차지했던 방탄소년단(BTS)과 근자의 영화 ‘오징어게임’이 그 정점을 구사했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성과가 쌓였고 지금도 쌓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흥행과 유행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밝히는 논고와 단행본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들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분석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물론 내가 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한 사례를 보탤 수 있을 뿐이다.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노래하는 장면. 뉴시스 |
‘저고리시스터즈’에서 ‘김시스터즈’까지
K-팝이라는 용어나 개념이 대두된 것은 1990년대 이후지만, 그 시작은 대체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로 꼽는 듯하다. 미8군 공연을 했던 이들을 선두로 꼽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김시스터즈도 이런 맥락에서 거론되었고 특히 미국 진출 1호 걸그룹이었다는 점이 부각된다. 하지만 김시스터즈를 의도하고 만들었던 이난영을 중심으로 볼 때 K-팝의 내력은 ‘저고리시스터’로 소급될 수 있다. 장유정은 ‘행과 불행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016)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수로서의 이난영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의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1939년경에 결성된 저고리시스터는 이난영을 주축으로 형성된 일종의 프로젝트성 그룹이었다. 당시에 조선악극단서 활동했던 가수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는데, 이난영, 장세정, 김능자, 서봉희, 이준희가 초창기 주요 구성원이었다. 경우에 따라 박향림, 홍청자 등이 저고리시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족두리와 한복 등을 활용한 의상에서부터 조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그룹이었기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오늘날 걸그룹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각주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김시스터즈의 미국 공연에서도 우리의 민요 등이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상호 영향 관계를 놓칠 필요는 없다. 이른바 걸그룹이 고안되었던 일제강점기는 이난영을 비롯한 가요계의 남상(濫觴)과 부침(浮沈)이 격동했던 시기다. 조선성악연구회를 비롯한 판소리와 우리 소리의 절차탁마와 쟁투가 극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여 자기 나라에 가서 가르친 H.B. 헐버트의 이름도 등장한다. 오늘날 김시스터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겠으나 적어도 이점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K-팝이란 이름이 등장한 것이 채 반세기도 되지 않았기에 이들 모두를 K-팝의 연원이니 원조니 하며 소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오늘날 신한류의 노정에 노둣돌 하나를 놓았던 이들이라는 점 말이다.
남도인문학팁
한국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와 김시스터즈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랄 수 있는 저고리시스터즈는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2차세계대전 기간이다. 이난영과 장세정은 고정 멤버, 김능자와 홍청자 등은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으로 중복활동을 했다. 유수한 판소리꾼들도 일본과 만주 원정 공연을 나가고 레코드 취입을 하던 시기다. 이난영의 딸 김숙자와 김애자, 조카 김애자(이봉룡의 딸)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1953년에 미8군 부대에서 공연하며 데뷔하였다. 미국 최고 TV쇼로 이름난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22번이나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5년 공식적인 활동을 종료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가요계가 급속하게 서구적 경향으로 흘러 오늘에 이른 점은 굳이 덧붙일 필요 없다. 저고리시스터즈와 김시스터즈의 중심에 사실상 이난영이 있다. 나는 지난 2016년 10월 28일 본지 칼럼을 통해 국민가수 이난영과 김시스터즈에 대해 소개하며 이난영의 친일가요를 둘러싼 풍경들에 대해 말했다. 1983년 잠실야구장, 해태타이거즈가 우승하자 자연스럽게 관중에서 울려 나온 ‘목포의 눈물’, 2006년 남북공동 6.15민족통일대축전 광주와 목포 행사에서 북한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합창한 ‘목포의 눈물’ 말이다. K-팝 나아가 K-컬쳐가 득세하는 오늘날 그 노둣돌을 놓았던 저고리시스터즈와 김시스터즈의 소환은 필연적이다. 다만 고려해야 할 게 있다. 이들은 일본과 미국에 복무해야만 하는 시대적 아픔도 겪었지만, 걸그룹의 단초를 놓는 작업도 했다. 오는 8월 10일 목포 화가의 집에서 이를 둘러싼 워크숍을 진행한다. 나와 더불어 장유정, 손재오, 정태관 등이 참여한다. 친일가요를 부르고 친미가요를 불렀음에도 이들이 우리에게 소중하고 또 극복해야 할 대상인 이유를 다시 상고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