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홍원 교수 |
![]()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작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킬레우스(가운데)가 아가멤논(왼쪽)을 죽이기 위해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사이에 아테네(오른쪽)가 내려와 그의 머리채를 잡는 장면. |
“분노를 노래하라 여신이여.” 이 세 단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노래하기 위해 여신(thea)에게 도움을 청하는 ‘초혼(invocation)’의 첫 세 단어이다. 여신이 특정되지 않았지만 제우스(Zeus)와 기억의 신 므네모시네(Mnemosyne) 사이에서 탄생한 아홉 뮤즈(Muse) 중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Calliope)일 가능성이 크다.
분노를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멸적인 분노를. 아카이아인들에게 수많은 고통을 가져온
이 분노는 수많은 용맹스런 영웅들의 영혼을 하데스로 내려
보내서 그들 본인의 주검을 들개와 모든 맹금의 먹이로
만들었다. 그렇게 제우스의 의지는 완성되고 있었다,
둘이 갈등으로 인하여 서로 길을 달리하면서.
아트레우스의 아들, 인간의 왕, 그리고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가.
고대의 서사시를 읽을 때 첫줄 혹은 첫단어(들)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초혼은 주제를 알리고, 주제에 대해 ‘노래’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도 알린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첫 단어인 menin(분노:목적격)이고 menin의 주어 형태는 ‘메니스(menis)’이다. 분노를 나타내는 표현은 이 외에도 ‘콜로스(cholos)’, ‘메가스 튀모스(megas thymos)’ 등 다양한데 ‘메니스’는 보통 신들의 분노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런 분노를 아킬레우스(Achilleus)가 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인해 수많은 아카이아인들(Achaios:그리스인들)이 고통에 빠지고 수많은 영웅들이 죽는다. 더구나 이 영웅들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남은 주검은 들개와 새의 먹이가 되는데, 고대사회에서 시신이 이렇게 방치되어 동물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아킬레우스의 “파멸적인” 분노가 만들어낼 일인데, 7행에서 그를 “신과 같은(dios:찬란한이라는 의미도 된다)”이라는 형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의 분노를 menis로 표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초혼을 마친 시인은 여신에게 물어본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초래한 신은 누구인가?
그 신은 아폴론이다. 그가 인간사에 개입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와 10년간 전쟁을 했는데 그동안 전투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주변의 해안도시들도 약탈했는데, 그중 한 도시에서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Chryses)의 딸 크리세이스(Chryseis)가 전리품으로 끌려온다. 그녀는 아가멤논의 차지가 되고 딸을 돌려달라고 찾아온 아버지 크리세스는 냉정하게 쫓겨난다.
그 후에 수많은 그리스 용사들이 원인 모르게 죽기 시작한다. 재난을 맞이한 아킬레우스와 장군들이 그 원인을 예언자 칼카스(Calchas)에게 문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아킬레우스여, 제우스의 사랑을 받는 그대가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노(menis), 멀리서 화살을 쏘는 아폴론의 분노입니다.”
장군들이 아가멤논을 찾아가서 크리세이스의 반환을 요구하자 아가멤논은 그 대가로 아킬레우스로부터 브리세이스(Briseis)를 빼앗겠다고 한다. ‘인간의 왕’으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투나 노략질의 결과로 얻어지는 전리품을 ‘게라스(geras)’라고 하는데 크리세이스 같은 “볼이 아름다운” 여인은 최상의 게라스로 평가되고, 이런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는 자는 그만큼 전투나 노략질에서 공을 인정받았거나 그 못지않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 이런 동료들 사이에서의 인정을 ‘티메(time)’라고 하며 대략 ‘명예’로 번역된다. 아가멤논이 크리세이스를 차지한 것은 그의 티메의 증명과도 같기에 그녀를 도로 내주는 것은 그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로부터 빼앗으려는 브리세이스도 크리세이스와 똑같이 “볼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된다는 점, 즉 브리세이스도 아킬레우스에게는 티메의 증명인 데에 있다.
7행에서 묘사되듯 아가멤논은 “인간의 왕” 즉 왕 중의 왕이고 제우스의 혈통까지 자랑하는, 요즘 말로 다이아몬드 수저이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전쟁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사로서 “최고”이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를 싸움이나 잘하는 뒷골목 깡패 취급을 하면서 그의 게라스를 빼았고,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은수저가 이길 수 없기에.
이로써 아폴론의 분노가 아킬레우스에게 전염된다. 아킬레우스는 바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그가 없는 그리스 진영은 초혼에서 말한 계속된 고통과 죽음을 맞이한다. 다이아몬드 수저가 전쟁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증명되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이로써 회복된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참혹하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의 첫번째 분노, 메니스의 결과이다. 이 분노는 총 24권의 <일리아스>의 1권부터 8권, 정확히 1/3 지점까지 유지된다. 다음 기고에는 나머지 2/3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어떻게 변질되는지, 또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