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서 뻘배를 타는 장도의 어머니들. 뻘과 갯물을 적절히 이용해 움직인다. 이돈삼 보성 벌교는 '꼬막의 지존' 참꼬막의 주산지다. 참꼬막은 알이 굵다. 비릿한 냄새가 약간 난다. 육질을 손으로 만지면 오므라들 정도로 싱싱하다. 조정래의 소설 에도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하다'고 언급돼 있다. 벌교꼬막의 4분의 3을 생산하고 있는 섬이 장도다. 장도는 '꼬막섬'이다. 장도를 꼬막섬으로 만든 건, 여자만(汝自灣)의 갯벌이다. 여자만 갯벌은 차진 진흙갯벌이다. 갯벌이 화장품 크림보다 곱고, 아이스크림만큼 부드럽다. 람사르습지, 습지보호구역,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된 갯벌의 '끝판왕'이다. 장도에는 독특한 풍경이 있다. 썰물 때가 돼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뻘배를 탄 마을 어머니들이 갯벌을 점령한다. 기계의 힘을...
편집에디터2022.06.23 15:50발리 오고오고 행진. 정지태 제공 6월 초 한국 최초로 도깨비학회를 결성하고 소소한 국제학술포럼을 열었다. 도깨비가 한국 고유의 호명법이라 세계 최초의 학회라 해도 무리는 없겠다. 영광스럽게도 이 몸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당분간 학회를 이끌 처지가 되었다. 학회원들에게 보낸 성료 감사의 인사말 중 해외발표문에 대한 논평 일부를 옮겨두고 그 의미를 새겨둘까 한다. 참고로 조자용의 왕도깨비 유산에 대한 김영균(도깨비학회 고문)박사의 기조발표 및 세계의 가면에 대한 김정환(도깨비학회 고문)소장의 기조발표 등 흥미진진한 국내의 발표가 있었다. 지면 활용상 이 발표들은 따로 기회를 만들어 소개해드리기로 하겠다. 뜻하지 않게 일본 및 해외 연구자들도 다수 가입신청을 해주어 고무적이었다. 미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창대한 미래를 예비하는 듯하다. 윤열수 명예회장, 나승만 명예회장, 박전열 ...
편집에디터2022.06.23 15:47그날따라 짙은 해무가 끼었다. 여수 백도의 물목, 바로 앞에 있는 매바위가 보일 듯 말 듯 지척이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안개였다. 지상의 눈 달린 생물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닌 듯했다. 천길 물속도 안개가 스몄던 모양이다. 길 잃은 물고기들이 방황하다 벼릿줄을 보지 못하고 그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물의 멸치는 만선하고도 넘칠 만큼 풍족하였다. 아들은 신이 났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손에 힘이 넘쳤다. 그런데 이물칸에서 백도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불안한 듯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물을 거두어라! 돌아가야...
편집에디터2022.06.16 17:33여름이 시작되었다. 젊음의 계절이라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질한 장마와 뜨거운 날씨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까 은근히 걱정된다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바다도 생각나고 물소리 들려오는 계곡도 벌써 부르는 것 같다 셰계를 뒤흔든 일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지만 이 계절이 되니 정말 가고파 지는 곳이 있다 또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미래'로 알려진 히말라야의 서쪽 라다크 지역이다 눈앞의 설산을 보면서 이색적인 문화에 빠져드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게서는 이미 떠나버린 것들이 그곳에 가면 살아 숨 쉬고...
편집에디터2022.06.16 15:02이진마을 표지석 항일운동의 성지, 이진마을 해남군 북평면에 위치한 이진마을은 완도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달마산(470미터)이, 북쪽으로는 대흥사를 품은 두륜산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에는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약 3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말과 함께 싣고 온 현무암이 지금도 이진마을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유다. 제주도와 뭍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였던 이진마을은 한때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 마을 300호면 대단한 규모의 동네다. "북평면 면장할래? 이진마을 이장할래?"하면 이진마을 이장한다는...
편집에디터2022.06.15 16:01맨해튼 한인상가거리. 차노휘 음식이라는 정체성 장기간 해외에 머물다보면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2018년 12월 말, 스쿠버다이빙 다이브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이집트 다합에서 두 달 정도 머물렀을 때였다. 출국할 때 혹시 몰라서 김치를 조금 싸가긴 했지만 며칠 만에 없어졌다. 그곳에서 비빔밥과 육개장을 요리하는, 이집트 청년이 운영하는 아시안 식당이 있었다. 가격은 한국과 별 차이가 없는데 가끔 먹으면 한국음식의 그리움을 달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오전 다이빙을 끝내고 비빔밥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음식 속에 한 뭉텅이 고양이털이 있는 게 아닌가. 사장이 새 비빔밥을 다시 내주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무슬림들은 고양이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식당 어디나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지만 쫓아내지 않는다. 다만 손님이 싫어하면 종업원이 물분무기를 주고는 고양이를 향해...
편집에디터2022.06.09 16:48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내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의 시, 인동차(忍冬茶)이다. 다 타지 않은 덩그럭 불, 물에 삶아 우려낸 인동차를 마시는 풍경이 그윽하다 못해 간절하다. 김 서린 흙냄새를 맡으며 바깥을 내다보니 눈바람 가득하다. 달력도 없는 어느 골짝 산중일 것이기에, 시간의 들고남이 무슨 상관이랴. 한겨울...
편집에디터2022.06.09 14:42강진갑부 김충식의 옛 별장. 강진미술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돈삼 강진은 '남도답사 1번지'로 통한다. 빼어난 풍광에다 품격 높은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강진은 높고 낮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다. 강진만 주변의 구릉이 넓고, 마량포구에는 낭만이 넘실댄다. 1000년의 신비를 간직한 강진청자,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절집 무위사도 자랑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알려진 시인 김영랑도 강진에서 났다. 시대를 초월한 큰 스승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강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다산의 강진 유배는 신유박해에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시작됐다. 강진 유배생활은 1801년부터 1818년(순조 18년)까지 18년 동안 계속됐다. 유배기간 이학래 등 18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
편집에디터2022.06.09 16:47"말이 맞지 못하야 이 날밤 삼경시에 바람이 차차 일어난다. 뜻밖에 광풍이 우루루루 풍성(風聲)이 요란커늘 주유 급히 장대상에 퉁퉁 내려 깃발을 바래보니 청룡주작(靑龍朱雀) 양기각(兩旗脚)이 백호현무(白虎玄武)를 응하야 서북으로 펄펄 삽시간에 동남대풍(東南大風)이 일어 기각이 와지끈 움죽 기폭판(旗幅版)도 떼그르르 천동(天動)같이 일어나니 주유가 이 모양을 보더니 간담이 떨어지는지라~" 판소리 적벽가 중 동남풍 부는 대목이다. 적벽대전 눈 대목의 하나, 긴박한 장면이기에 자진모리로 노래한다. 이 바람 아니었으면 주유가 조조의 백만 ...
편집에디터2022.06.02 15:23사라진 왕국 백제의 숨결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1,400 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아득하다 하지만 그 숨결은 아직도 느낄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있겠는가마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분칠되기 일쑤여서 왜곡되고 숨겨진 진실은 오늘도 恨을 풀지 못한다. 신라가 끌어들인 외세는 이 땅을 짓밟았고, 의자왕은 망국의 한을 품고 대륙으로 끌려갔다 있지도 않았던 삼 천 궁녀는 또 무엇인가 죽어서나 간다는 낙양의 북망산 언저리에서 근세에 심상치 않는 무덤이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백제 왕의 무덤이라 했으니 그게 의자...
편집에디터2022.06.02 14:56민중 판화미술의 선구자 혹은 노동자와 농민 등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진실을 과장 없이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던 예술가 케테 콜비츠를 소개한다. 케테 슈미트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1867~1945년) 은 독일 출신의 화가이자 판화가, 조각가이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전반기의 인간 조건을 사실적이고, 애틋하게 묘사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불행한 사람, 가난과 전쟁의 피해자들, 노동자에게 관심이 있었고 이를 그림, 데생(drawing), 에칭(동판화, etching), 리소그래피(석판 인쇄, lithography), 목판화(woodcut)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작업은 자연주의적 성향을 기반으로 시작하였지만, 후기 작품들은 표현주의적인 경향도 담겨져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와 평등, 평화, 자유를 향한 갈...
편집에디터2022.05.29 17:46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이민자의 역사 1903년 1월 13일, 한국인 최초 미국 이민자가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들이 적극 알선한 결과였다. 그들 중 상당수(남녀 50명과 노동자 20명)가 감리교 교사나 통역사였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민 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조국이 식민지가 되자 신앙심만큼이나 애국심도 강조되었다.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그 뒤 미국은 한동안 아시아계 이민자를 받지 않다가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유럽계뿐만 아니라 비유럽계, 그러니까 아시아나 중남미,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원인에 대해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는 "소련과 이념 경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비서구권 국가에서 일렁이는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려면 인종차별적인 짐 크로법의 이미지를 지우고 재부팅해 미국 민주주의의 우월성...
편집에디터2022.05.26 16:11흑백영화 7인의 사무라이 마지막장면 캡쳐. '7인의 사무라이'가 궁극적으로 지켜낸 것은 무엇일까 영화 '7인의 사무라이'만큼 많이 회자된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토대로 리메이크된 많은 오마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54년 개봉하였으니 우리로 말하면 동족상잔의 화마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 감독의 흑백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는 일목요연하게 사무라이들의 의기투합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황야의 7인' 등 리메이크된 수많은 영화도 이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모내기다. 사무라이들의 주제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내게는 대미나 대단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거론하...
편집에디터2022.05.26 16:19용암마을의 담장 벽화-마을의 당산제와 줄다리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돈삼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다. 흡사 성곽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 네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크고 굵은 고목에서부터 비교적 젊은 나무까지 모였다. 오래된 나무이지만 가지가 많이 뻗고, 이파리도 우거졌다. 도란도란 화기애애한 가족 같다. 나무숲에는 마루 넓은 정자가 들어앉아 있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마을사람들의 쉼터임을 알 수 있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았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다. 바람도 솔솔 얼굴에 와 닿는다. 마음 같아선, 두 다리 쭈-욱 뻗고 드러눕고 싶다. 금세 낮잠이 몰려올 것 같다. "시원하요? 어디서 왔소? 여기가 우리마을 쉼터요. 가장 굵은, 이 나무는 수령이 500년은 넘었을 것이오. 해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나무요...
편집에디터2022.05.26 16:42나주 금성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로 거의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의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다. 김천일은 중종 32년(1537) 외가인 나주 흥룡동에서 김언침과 양성 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난다. 흥룡동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처 장화왕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고려 2대 왕인 혜종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김천일의 옛집, 즉 부친의 집은 담양부 창평현 태산리(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였지만, 모친이 친정에서 낳았으므로 나주인이 된다. 김천일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다. 태어난 지 이튿날 모친 이씨가 돌아가셨고, 7개월 만에 부친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이유다. 그는 15살이 된 명종 6년(1551) 작은아버지 김신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 19세가 되던 1555년(명종 10) 당시 ...
편집에디터2022.05.25 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