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다산의 향기 서려있는 '사의재'…남도답사 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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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다산의 향기 서려있는 '사의재'…남도답사 1번지
강진 동문마을||사의재,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실학 밑그림… 다산실학 태동지||영랑생가·시문학파기념관||금서당·세계모란공원이 지척||강진미술관의 다산 청동상||옛 갑부 김충식 별장도 볼만㎡
  • 입력 : 2022. 06.09(목) 16:47
  • 편집에디터

강진갑부 김충식의 옛 별장. 강진미술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돈삼

강진은 '남도답사 1번지'로 통한다. 빼어난 풍광에다 품격 높은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강진은 높고 낮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다. 강진만 주변의 구릉이 넓고, 마량포구에는 낭만이 넘실댄다. 1000년의 신비를 간직한 강진청자,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절집 무위사도 자랑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알려진 시인 김영랑도 강진에서 났다.

시대를 초월한 큰 스승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강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다산의 강진 유배는 신유박해에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시작됐다. 강진 유배생활은 1801년부터 1818년(순조 18년)까지 18년 동안 계속됐다. 유배기간 이학래 등 18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유배에서 풀려나 18년을 더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라비아숫자 '18'과 여러 번 엮이는 삶이다. 공교롭게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도 18번국도다.

강진에는 다산의 향기가 여기저기 서려 있다. 강진읍 동문마을도 손가락에 꼽힌다. 오래 전 강진읍성의 4대 문 가운데 하나인 동문(東門)이 있었다는 곳이다. 강진의 진산 보은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강진청자를 주제로 한 마당극 공연. '조만간' 프로젝트의 하나로 기획됐다. 이돈삼

다산은 다산초당에 거처를 정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4년을 보냈다. 동문마을 주막 '사의재(四宜齋)'에서다. 다산이 여기에서 실학의 밑그림을 그려, 사의재는 다산실학의 태동지가 됐다.

실학(實學)은 관념이나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다. 실생활에 도움이 돼야 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학문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 부국유민(富國裕民)을 내세운다.

다산의 끝은 창대했지만, 강진에서의 첫 생활은 비참했다. '또 전전하여 강진으로 귀양 왔다. 강진은 예전 백제의 남쪽 변방이다. 낮고 비루한 데다 풍속이 남달랐다.' 다산이 강진 유배 초기를 떠올리며 <상례사전(喪禮四箋)>에 남긴 기록이다.

유배자의 거처는 지방의 관아에서 정해주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다산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외려 냉대를 했다. 주민들도 행여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까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잠갔다. 초겨울 바람이 거칠었지만, 대역죄인으로 내몰린 다산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진 밤, 멀리서 불빛 하나가 다산의 눈에 보였다. 마을의 우물가에 자리한 '매반가(賣飯家)'였다. 밥을 파는 집, 주막이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다산은 다짜고짜 밥 한술을 청했다. 주막집 노파는 혀를 한번 차더니, 따뜻한 밥을 내어줬다. 절망하던 다산과 노파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다산은 노파가 내어 준 골방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녹였다. 하루, 이틀, 사흘…. 다산은 골방의 들창을 가리고, 밤낮없이 방에서 지냈다. 말 한마디 건넬 사람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혼자서 보냈다.

다산 정약용 동상. 높이 10미터의 청동상으로 강진미술관에 최근 세워졌다. 이돈삼

"어찌 헛된 삶을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죽비 같은 노파의 말에, 다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다산실학의 집대성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사의재'는 다산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다잡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달리면서 붙인 이름이다.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한다.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다산이 <사의재기(四宜齋記)>에서 언급했다.

다산은 사의재에서 4년, 제자 이학래의 집과 보은산방에서 4년, 다산초당에서 10년을 살았다. 강진에서 18년 동안 다산은 조선에서 으뜸가는 실학자로 우뚝 서게 된다. 다산에게 사의재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이고, 실학 집대성의 마중물이었다.

그 사의재가 복원되고, 주변에 저잣거리가 조성됐다. 강진군이 2015년부터 추진한 사의재 명소화 사업에 의해서다. 사의재는 돌담을 따라 동문마을 어귀에서 만난다. 작은 연못 위로 난 나무다리를 건너면 주막이 자리하고 있다.

주막의 주모는 다산이 즐겼던 아욱국에다 밥을 내놓는다. 동동주와 파전도 판다. 한켠의 골방도 다산이 살던 그때 그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다산을 따뜻하게 맞아준 노파와 딸의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매주 토․일요일에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노파와 딸도 만날 수 있다. 길손에게 너스레를 떨며 반겨준다. 조선을 만나는 시간, '조․만․간'도 재밌다. 오전 11시, 오후 3시 공연한다. 강진청자를 주제로 한 도공들의 밝고 활기찬 소동을 마당극으로 꾸몄다. 지역주민으로 이뤄진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다.

당시 옷차림을 한 젊은 무사들도 고샅을 누빈다. 긴 칼과 창을 들고 오가는 무사들이 기념사진을 함께 찍어준다. 다산이 살았던 그때 그 시절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다.

사의재 인근에 들러볼만한 데도 많다. 영랑생가, 시문학파기념관, 금서당, 세계모란공원이 지척이다. 강진미술관에는 높이 10미터, 무게 14톤의 다산 청동상과 옛 갑부 김충식의 별장이 자리하고 있다. 김충식은 강진농고 부지와 함께 건립비용으로 12만 원을 내놓는 등 교육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5·18전남사적지로 지정된 전남생명과학고(옛 강진농고)와 강진읍교회도 가깝다. '남도답사 1번지'를 더욱 빛내주는 동문마을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