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양귀비와 어우러진 임곡마을 풍경. 전형적인 농촌 풍경 그대로다. |
5월 역사 인물에는 김동수(1958~1980) 열사가 선정됐다. 열사는 1980년 5·18 때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동 2층에서 공수부대에 맞서다 총격을 받았다.
김동수는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임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삼초교, 장성중, 조대부고를 거쳐 1978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광주 향림사와 관음사에서 고등부 불교학생회에 이어 조선대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 3학년이 된 김동수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전남지부장을 맡고, 4월부터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으로 일했다.
![]() 임곡마을 풍경. 김동수 열사 생가 대문 앞 풍경이다. |
김동수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접한 건 5월21일 목포에서다.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로부터 광주학살 소식을 전해 들은 김동수는 시위대 차량에 올랐다. 광주로 돌아온 김동수는 곧장 전남도청으로 가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희생자 시신 처리를 도왔다.
공수부대의 도청 침탈을 앞둔 26일 밤, 도청에서 나갈 것을 제안받은 김동수는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생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김동수는 27일 새벽 도청 민원동 2층 회의실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도청이 공수부대의 군홧발에 짓밟힌 뒤,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묘역에 묻혔다. 가족은 6월6일 그의 신원을 확인했다.
![]() 김동수 열사의 얼굴이 그림으로 걸려 있는 김동수기념관. 생가의 창고를 고쳐 만들었다. |
열사의 태 자리인 임곡마을회관 앞에서 지난해에 이어 5월24일 추모문화제도 열렸다. 생가에 김동수 기념관도 만들어졌다. 창고를 고쳐 만든 기념관에는 열사의 얼굴이 그림으로 걸려 있다.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을 그린 이상호 화백의 작품이다. 치유예술가로 활동하는 주홍 작가의 그림과 글도 함께 걸렸다.
“예전에 나락 창고로 쓰던 곳입니다. 부모님의 땀방울과 정성이 배고, 형의 손때도 탄 곳입니다. 비록 작고 겉보기에 볼품없는 기념관이지만, 여느 곳보다도 뜻깊은 공간입니다. 앞으로 김동수 열사를 그리고 생각하는 공간으로 채우고 가꿔가겠습니다.”
열사의 동생 김동채씨의 말이다. 동채씨는 생가에서 혼자 살고 있는 구순(九旬)의 어머니 김병순 어르신을 자주 찾아뵌다. 김병순 어르신의 일상을 노래한 조현옥의 시 ‘밥티나무꽃 그늘 아래서’도 기념관에서 만난다.
‘그집 그 뒤란에는 밥티나무꽃 붉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해마다 밥티나무꽃만 피었다 집니다./ 어머니는 길을 잃은 사슴처럼/ 밥티나무꽃 그늘 속을 서성거리다가/ 일거리를 찾지 못한 손처럼 싱숭생숭/ 아직도 해질녘 논두렁 길 헤매이고 계십니다./ 산등성이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못하시고/ 그 너머너머 해가 되어 어둠 속을 걸어 들어가십니다.’
![]() 장성 서삼초등학교에 있는 김동수 열사 추모비. 1996년 세워졌다. |
김동수 열사의 태 자리인 장산리(莊山里)는 서삼면 소재지다. 서삼면은 장성 11개 읍면 가운데 인구가 적은 면에 속한다. 1500여명이 산다. 장성군 서쪽에 위치한다고 서삼면(西三面), 고장산 아래에 있다고 ‘장산’이다. 마을 앞으로 들이 넓다.
장산리는 임곡, 신기, 외연, 고장산, 덕산 등 5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임곡(林谷)은 숲이 많다고 이름 붙었다. ‘숲실’로도 불린다. 새로 생긴 동네는 신기, 마을 뒷산이 벼루 형국이라고 외연, 고장산을 품었다고 고장산이다. 덕산은 신선의 북 치는 소리가 둥덩둥덩 울린다고 ‘둥덩뫼’로 불렸다. 한때 ‘둔덕’으로도 표기했다. 행정복지센터 등 행정기관은 신기마을에 모여 있다.
![]() 임곡마을과 덕산마을 사이로 흐르는 냇물. 전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마을에서 편백과 삼나무숲으로 유명한 축령산이 가깝다. 축령산에선 ‘태백산맥’과 ‘쌍화점’ 등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다. 숲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산림욕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난다. 축령산으로 가는 도로가 임곡과 덕산마을 사이를 가로지른다. 고창~담양 고속도로도 저만치 보인다. 울산김씨 제각 임천재는 마을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