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나주 남평 한센인 마을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하다 5·18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씨. |
광주 외곽의 작은 마을에 살던 25세의 나는 광주의 5·18을 목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항쟁 열흘 간의 기억과 감정을 마음에 묻어둔 채 수년 간 세상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는 광주 항쟁에 대한 회고록 ‘Witnessing Gwangju(번역본 5·18 푸른 눈의 증인·2020년)’를 쓰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
5·18 이후 그리고 회고록 출간까지 그동안 ‘오월’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전남일보 지면을 통해 그간의 교훈들을 광주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왜곡 서사 막기 위해 진실 알려야
항쟁이 끝나고 2019년 한국에 되돌아왔을 때,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우연히 한 시위대와 마주쳤다. 그들은 행동에 예의가 없었고 무질서했다.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확성기에서 나오는 구호가 나를 화나게 했다. 시위대는 ‘5·18은 전라도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자 북한이 선동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시위대들을 향해 ‘당신의 아들과 딸들이 광주에서 죽는 장면을 내가 똑똑히 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라고 외치고 싶었다.
진정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군사독재 정권이 광주에서 수백 명을 죽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거짓 서사를 꾸며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참동안 왜곡이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은 왜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거짓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1980년 전두환씨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일부 통치자들은 여전히 하나의 왜곡된 서사만을 고집한다. 되레 미래 세대들이 제대로 된 정보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진실이 공유되지 않으면 왜곡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때 나는 5·18 목격자로서 한 가지 역할을 깨달았다. ‘오월에 대한 왜곡 서사가 더 힘을 얻기 전에 이를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광주 오월 이후 수년 간 그날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나서야 광주의 이야기가 수집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한국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놓쳐지고 있을까’ 걱정됐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맨 왼쪽) 기자가 인터뷰 취재를 하는 동안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두번째) 등 평화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
2019년 나주 남평에서 항쟁 당시 살았던 호혜원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운전사와 5·18 이야기를 하던 중 기사 신모씨가 “5·18 당시 제 형이 죽었어요”라고 망설이듯 말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신씨의 형은 광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계엄당국에 의해 죽었다. 광주에서 남쪽으로 몇 ㎞ 떨어진 곳에서 군인들이 그가 탄 택시에 총을 쐈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신씨의 형은 아직까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이 말을 듣자 80년 5월 22일 광주 외곽을 지나다 목격한 총알자국이 가득한 버스와 택시의 참상이 떠올랐다. 피가 흥건한 채 택시 안에 누워 있을 신씨의 형을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이 돌았다.
신씨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신 한번만이라도 보는게 소원이라던 신씨는 그렇게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왜곡되고 사라지고 있을까’ 하는 고민이 남는 순간이었다.
5·18과 같은 중대한 사건은 모든 이야기가 전해져야 마땅하다. 트라우마를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물론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군인들의 내용도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과 국가를 변화시킨 사건을 이해하려면 모든 이야기를 수집해서 다시 짜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 한국 방문에서 한 기자가 ‘광주의 젊은이들이 항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는 말을 들었다.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몹시 놀랐다. 항쟁의 역사는 부끄럽거나 뒤로해야할 것이 아닌데 말이다. 광주 항쟁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로 이끈 중요한 사건이다.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치 역량과 회복력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우리는 오월의 비극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로 인한 놀라운 업적과 성취·자긍심을 기념해야 한다. ‘비극’에 맞춰져 있던 시선을 이제 희망과 긍지로 옮겨야 한다. 단순히 ‘5·18’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이룩한 것을 기념해야 한다. 모든 시민항쟁은 비극적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지혜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광주의 오월에서 삶을 배우고 있다. 44년 전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사람들이 하나가 돼 서로 격려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제라도 왜곡된 진실·잘못된 서사가 바로잡히길 소망한다. 다시는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배척하고 싸우는 일을 멈추고 5·18정신 계승을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 해당 특별 회고문은 폴 코트라이트가 광주항쟁 44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즈에 기고할 예정이었으나 대한민국 국민 및 광주시민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본보 기고를 결정했다.
●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나주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5월19일 광주 터미널에서 군인이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을 목격하는 등 처절한 상황을 직접 본 목격자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난 2020년 외부인의 시선에서 항쟁을 바라본 책 ‘5·18 푸른 눈의 증인’을 집필했다.
코트라이트는 회고록 속에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을 아주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한센인과 함께 터미널에 갔다가 처음 군인의 폭력을 목격했고, 편지를 부치러 간 우체국에선 코앞에 떨어진 최루탄과 마주했다. 이후 넘어진 버스에 새겨진 총알구멍과 핏자국에 충격을 받았고, 외신기자들과 함께 간 병원에서 시신들을 목격했다. 또 전화가 끊기고 탱크·군인의 총구에 막혀 외부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자 광주 외곽과 산을 넘어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는 회고록에서 ‘5월 20일 충장로에서 어느 할머니와 만났다. 의사와 관계없이 나는 이미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고 썼다.
항쟁이 끝난 이후에는 공중보건 분야에서 석·박사를 딴 뒤 한국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
1979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폴 코트라이트가 80년 1월 근무하던 나주 한센인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폴 코트라이트 제공 |
번역=최용주 5·18조사위 조사1과장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