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어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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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어른이 된다는 것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 입력 : 2025. 07.29(화) 17:45
임효경 완도중 前교장.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유례없는 폭염은 두려움 자체였다. 이 땅이 사막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끊임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제주도 땅은 갈라지고 농작물은 타들어 간다고 했다. 다급한 마음이 간절한 기도를 하게 했다. 하늘이시여, 비를 좀 내려주세요. 이 땅을 좀 식혀주세요.

그런데 뭔가 소통이 잘못됐던가 보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무등산 계곡에서 시작된 물은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와 수량으로 소태천으로 흘러 내려갔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 개천이 넘치게 된다면, 지하 2층 주차장에 물이 차게 될 수 있으니 속히 자동차를 지상으로 옮기라는 관리사무소의 방송이 그 불안감을 더하게 했다. 방송을 들으니, 광주천이 넘칠락 말락 불안했고, 영산강 하구 근처 농촌 마을과 도시 저지대 동네가 물바다가 됐다.

올봄 산불로 수목이 타버린 산청 산간마을은 더 심각했다. 황량해진 산이 물을 품지 못하니 수마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험악했다. 근심이 가득한 한 어른은 살아생전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라고 했다. 논밭의 농작물은 초토화되고 집도 무너지고 가축은 물살에 떠내려가며 울어댔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또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가슴이 아팠다. 평생 터 잡고 살아온 집이었는데. 다시 돌아가 물에 젖은 가구를 씻어 말려 다시 들여놓은들 다시 그전처럼 마음이 뽀송뽀송 살아질까? 젊은이는 떠나고 어르신들이 지키고 있을 그 마을에 다시 예전의 다정함과 평온함이 찾아올까? 고개가 살래살래 흔들어지면서, 내 마음이 편치 않다. 에고, 어찌할꼬.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몸과 마음이 아파오는 것이다. 내 몸에 이렇게 관절이 많았었는가?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과 손목과 어깨와 무릎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뼈들이 하나씩 자기의 존재감을 피력한다. 뻣뻣하기도 하고, 퉁퉁 붓기도 하고, 삐거덕 소리도 낸다. 심지어 앉고 일어설 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이고~!’이다.

마음은 어찌 이렇게 연약해졌는가?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재난들이 예전과 다르게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근심이 많아진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도 젊은 애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노심초사 눈치를 본다. 또한 그 내 마음을 몰라주고 버릇없이 예의 벗어난 행동을 해오면, 마음이 팩 쪼그라들면서 미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오래 간다.

예전에 하지 않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길가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을 보면, ‘아이~~ 예뻐라~!!’ 하천 얕은 물가에 백로가 노닐고 있어도, 그들이 눈에 들어와 괜히 성가시다. 먹을거리라도 있는 것인가? 예전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숲속 길을 걸으면서도 멋진 소나무를 만나면 꼭 말을 건다. ‘야, 소나무 멋진데~~’. 동네 길가에 울창하게 서 있는 200년 수령 느티나무 할아버지에게도 지나가면서 인사한다. ‘안녕하시지요?’

나는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인가? 앞으로 또 어떤 나이 듦의 현상이 나타날까? 80살 먹으면 어떤 마음이고 어떤 세계일까? 궁금해진다. 스무 살이 된 손녀 예원이랑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서로 보고싶어 할까? 손자 하진이는 할머니보다 두 배는 키가 크고 상남자 덩치를 자랑할 텐데, 내 생일날 찾아와 다정하게 인사하고, 저를 꼬옥 안아보게 해 줄까?

내가 어느새 이렇게 할머니가 됐다. 부모님은 다 하늘나라로 돌아가시고, 내가 집안의 어른이 됐다. 엄청난 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님 앞에 가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내 생일에는 꿈에라도 찾아오셔서 ‘축하한다, 내 딸아’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다. 괜히 우울해지고 눈물이 뺨에 흘러내리곤 한다. 제가 그땐 몰랐어요. 그땐 정말 철이 없었어요. 나이가 선생이에요.

어린 시절은 동네 만화가게 어두운 구석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가 그것도 모자라 만화책을 빌려와 밤새 읽었다. 엘리사가 멋진 왕자님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읽어내느라 비싼 전기 불을 켜 놓으면, ‘불 끄고 그만 자거라!’ 하셨던, 엄마의 자린고비 소리가 듣고 싶다. 어린 딸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고름이 차올라 터져버릴, 시대의 아픔 속에서 외롭고 힘들게 날개를 접고 살아야 하셨던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런저런 이야기, 나약하지만 풍성한 감성의 목소리를 정말 듣고 싶다.

엄마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때의 두 분을 이해하게 되고, 용서가 되고, 다시 만나고 싶다니. 아득한 그리움이 되다니.

만화책 가게에서 더 읽을 책이 없을 무렵 국민학교로 진급했다. 한글을 익히고 간 몇 안 되는 아이 중의 하나가 됐다. 내 짝꿍 용곤이는 내 책상을 자꾸 넘어왔다. 받아쓰기 글자를 모르고 산수를 못하니, 내 답이 궁금했던 게다. 코흘리개 그 아이에게 내가 좀 심하게 굴었다. 둘이 같이 쓰던 책상에 금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모질게 대했다. 내 인생 첫 갑질이었다. 지금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면, 사과하고 싶다. 미안했었다고. 추억이 회한으로 넘어왔다.

나이를 든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하고는 좀 다르다. 한마디로 복잡하다. 그래서 백발의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과연 나이 들어가는 우리, 지혜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