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병흠>재난 속에 잉태된 불멸의 음악 '님을 위한 행진곡'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독자투고
기고·정병흠>재난 속에 잉태된 불멸의 음악 '님을 위한 행진곡'
정병흠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연구실장
  • 입력 : 2022. 04.14(목) 13:38
  • 편집에디터
정병흠 연구실장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재난'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980년 5월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광주시민들에게 일어난 국가폭력도 재난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재난을 시민 스스로가 위로하고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음악이 있다.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2022년, 5·18민주화운동은 42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재난 속에 잉태된 불멸의 음악 '님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배경으로는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 그리고 들불야학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78년 7월,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는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학생이었던 박기순과 전복길, 신영일, 김영철, 최기혁, 임낙평, 나상진 등이 함께 노동자들을 위한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당시 광천동은 아세아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광주공업단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생계를 위해 배움을 포기한 노동자들을 위해 중등학교 과정을 개설한 들불야학은 위치 상 안성맞춤이었다. 들불야학의 '들불'은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박기순이 제안했던 것이다.

들불야학 학생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 속에서도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며 사회에 대해 점차 눈을 뜨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게 '앎'과 '희망'을 안겨주기 시작했던 들불야학에도 슬픔의 시간이 찾아오게 되는데, 박기순이 12월 26일 새벽 연탄가스 중독으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렇지만 들불야학과 박기순의 신념은 남은 이들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윤상원은 1979년 1월부터 일반사회 강학으로 활동하게 된다. 윤상원은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당시 사회문제와 부정부패척결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했지만 그해 6월 27일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과 '6·29학생시위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노동현장을 체험하고자 광천공단과 양동신협에 취업해 근무하면서 이듬해 들불야학 강학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것이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사망하며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현실이 되는 듯 했으나,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는 또 다른 재난을 암시하게 된다. 결국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참히 짓밟으며 광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무고한 시민이 국가폭력에 의해 죽고 다쳤다. 잠깐 사이 주검이 되어 맞닥뜨리게 되는가 하면, 외출해서 돌아오지 못한 가족과 이웃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거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재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불야학의 윤상원, 박용준,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등은 학생들과 함께 군부에 의해 통제된 광주의 상황과 시민항쟁의 방향을 알리고자 5월 21일부터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했다. 그리고 윤상원은 25일부터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변인 활동을 자청했으며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항거하기로 했다. 결국 27일 새벽 4시경 전남도청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의 집중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1980년 5월 광주는 결국 신군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찢겨졌다. 27일 이후 언론은 광주에서 희생된 이들을 폭도로 몰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죽고, 다쳤으며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국가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5·18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광주시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은 밝혀져야 했던 것이고,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였을 것이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북구 망월동에서는 민주영령을 추모하는 또 다른 행사가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의 '박기순'과 1980년 5·18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이었다. 영혼결혼식은 들불야학을 함께 했던 '김영철'의 부인인 '김순자'씨의 중매로 성사되어 진행되었고, 주례사는 문병란 시인의 헌정 자작詩 '부활의 노래'로 대신했다. 영혼결혼식은 양가 가족과 김상집, 전영원, 김영철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하게 치러졌다.

이후 전용호, 김선출 등 들불야학과 민주화운동에 뜻을 함께하고 있던 몇몇은 '5·18민중항쟁' 2주기를 행사를 준비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1982년 4월 어느 날, 황석영·김종률·전용호·오정묵·임영희·임희숙·윤만식·김선출·이훈우·김은경 등은 황석영의 집에 모여 '박기순 열사' '윤상원 열사' 영혼결혼식에 헌정하는 노래굿 '빛의 결혼식-넋풀이'를 제작하였다. 넋풀이는 7곡의 노래와 무녀의 초혼굿 사설,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 등 9파트로 구성되어 총 36분 2초의 테이프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광주에 살던 어느 두 젊은 넋의 죽음과 사랑에 대한 노래이야기입니다.'로 시작되어 꽹과리 소리 울려 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 된다. 19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산화한 윤상원과 5·18항쟁 당시 두드러진 활약이 있었던 들불야학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은 5·18민중항쟁의 상징성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남은 이들의 도약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이 1979년 'YW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투옥 중 1980년 지은 시 '묏비나리'에서 황석영이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 가사를 지었고, 김종률이 작곡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79년 11월 계엄해제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백기완의 詩 '묏비나리'와 1980년 5월 광주의 재난 속에서 희생된 이들과 남은 이들의 민주화 염원을 담아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창되지 않는 수난을 겪어야 했던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5·18민주화운동 정부 공식행사를 비롯해 민주·인권·평화를 열망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곡이 되었다. 그리고 1982년 홍콩을 시작으로 1988년 대만, 2012년 중국, 2018년 캄보디아, 2019년 다시 홍콩, 2020년 태국, 2021년 미얀마 등 바야흐로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다.

봄은 많은 이들에게 꽃향기로 다가오지만, 아직도 광주에는 42년 전 가족과 동료를 잃은 슬픔이 봄보다 더 진하게 다가오는 이들이 많다. 42년 전 광주가 겪었던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분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정권은 바뀌었지만 5·18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에서도 '님을 위한 행진곡'이 변함없이 제창되어지길 기대해 본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