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교토 코무덤 위령제 장면. 이윤선 촬영 적장(敵將)의 후손들이 진도를 찾는 이유 2006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일군의 일본인들이 진도를 방문했다. 일본 수군의 후손들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의 수군을 말한다. 방문단은 일본의 시코쿠(四國) 에히메(愛媛)현 출신들이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 이즈음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매해 방문이 이루어졌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상들을 찾아온다는 것. 그들의 조상이 진도에 묻혀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2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진도신문의 박종호 기자가 잘 정리해두었다. 당시 80세였던 이기수 옹의 제보로 왜덕산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둘목 인근의 마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 아마도 1960년경이...
편집에디터2019.07.17 13:14전남 진도 지산면 앵무리 소앵무 재수굿(날받이, 송순단 시댁) [2012.5.27] 나주 공산면에서 진도 지산면으로 송순단, 현재 대표적인 진도씻김굿 연행자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엄마로 잘 알려져 있다. 1958년 진도군 지산면 길은리(고길 마을)에서 송병수와 여금순의 첫째 딸로 태어난다. 위로는 오빠 송지군, 아래로는 두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주 공산면에서 아버지 따라 진도로 유랑 생활을 온 어린 소녀였다. 사당패나 협률이나 그런 유파를 따라왔을 터인데, 구체적인 정황을 알기는 어렵다. 아들을 못 낳아 집안에서 쫓겨났다고도 한다. 진도에 온 후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딸만 홀로 되었다. 여차여차 고길 마을 박종필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호적에 박금순으로 되어있는 이유다. 지산면 소재지 마을 면장댁 식모로 들어갔다. 그동...
편집에디터2019.07.10 13:11어머니(사진작가 문월식 제공) 모욕적인 이름 씨받이 '내가 사니 상투가 있나 죽으믄 무덤이 있나.' 상투가 남근을 상징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이 없다는 뜻이다. 술만 먹으면 푸념을 늘어놓던 남편에게 대를 잇게 하는 특단의 조처를 강구한다. 후처를 보게 하는 것. 홍역으로 작은 아들을 보내고 사라호 태풍으로 남은 아들마저 보낸 본처 막이의 결정이었다. 당시 스물 네 살이던 후처 춘희를 들이고 나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10년 후 남편은 세상을 떴지만 한 영감의 두 마누라 동거는 평생으로 이어진다. 한 지붕 두 아내(MBC 스페셜 다큐멘터리, 감독 박혁지, 2015) 얘기다. 다큐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까지 씨받이는 흔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은 뒤 돌아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자막처럼 씨받이가 그렇게 흔한 일이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
편집에디터2019.07.03 11:33베트남 다낭 남오마을 앞 바다에서 멸치를 잡고 있는 바구니배(건너편이 다낭 시내임). 이윤선 촬영 베트남 중부 다낭 해안의 젓갈 담던 마을 남오(Nam O)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이 느억맘과 맘넨이 한국의 젓갈과 너무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20여년 전 베트남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이 관심사를 확대시켜 왔다. 하지만 정작 심도 있는 연구의 단계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최근 2014년 베트남 중부 다낭 해안에 있는 남오 마을을 다시 찾아 느억맘 제조 전문집을 조사했다. 2015년과 2016년 재차 방문하여 바구니배(흔히 '통버이'라고 부름)로 물고기 잡는 과정 등을 추가 취재했다. 전체 과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발효실과 발효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남오마을 바닷가에는 지금까지도 바구니배 수십 척이 어로활동을 유지...
편집에디터2019.06.26 14:00광주지산유원지에서 남도민요하는 강송대 박초향 명창. 강송대 명창 제공 어머니의 '흥그레타령'으로부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방(작은방)에 상방을 모셨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상방에 메를 지어 올렸다. 메를 올릴 때마다 향을 피우고 나지막하게 우셨다. 아니지 노래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것이 노래인지 울음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머리 풀고 앉아 통곡을 하셨다. 어린 나의 아침잠을 깨는 이 울음소리는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던 소리였다. 잠 많은 내게 그 울음들은 때때로 꿈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혼몽의 세계로 인도했다. 몇 시간이면 기억에서 사라지던 수많은 꿈들 사이로 마치 낯익은 손님처럼 들어오곤 했다. 그때는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일종의 선율 파동들. 어떤 날 이 소리들은 잔솔들 헤집고 뒤까끔(뒷산)을 거슬러 올라가 하늘 가득 퍼져나가는 듯했다." 내가 '이윤...
편집에디터2019.06.19 13:46정관채(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 수의(壽衣)에서 배내옷으로, 쪽빛의 매혹"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어린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壽衣)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장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나도 그랬다. 홰치는 닭소리가 해무 자욱한 미명을 걷어내듯, 문득 다시 태어나는 감정에 사로잡히던 새벽의 경험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오래, 가난한 살림이라 물려주고 받을 만한 것도 없었다. 아마도 옛 짐들을 정리하던 그런 때였을 것이다. 오래된 궤짝에서 헤진 이불보가 나왔다...
편집에디터2019.06.12 14:49청암 김성권 선생의 생전 공연모습.청암판소리고법보존회 제공. 일고수 이명창, 암고수 숫명창"북치는 맛은 뭐니뭐니 해도 명창들이 할 때 신바람이 나지. 못하는 사람한테 북을 치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그래. 북을 궁글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제. 북은 소리에 따라 북이 소리를 내는 것이야. 이런 말이 있어. 일고수 이명창,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고수가 잘 쳐줘야 소리를 잘 할 수 있다 이런 뜻이지" 명고수 청암 김성권의 구술이다. 판소리 창자의 '소리길'을 도와주는 것이 고수의 일차적 역할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판소리를 진행하는 것을 '소리를 가지고 간다'고 표현한다. '일고수'라 함은 예컨대 소리를 잘 가지고 가지 못하는 창자들을 고수가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완급(緩急)을 미세하게 조절하기 위해서 템포를 밀고 당기는 역할을 고수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
편집에디터2019.06.05 13:562006. 11. 26-여수영당 조사사진여수 국동 영당은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을 신격(神格)으로 모신 유일한 당산(堂山)이다. 도서해안지역에서는 줄여서 당(堂)이라 한다. 표지판에 간략하게 영당의 역사를 기록해두었다. "예부터 바다를 수호하는 해신당으로 1443년 단을 두어 고려 충신 최영 장군을 모셨다. 임란 후인 1763년 사당(해신당)을 건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녹도만호 이대원, 정운 장군 영정을 같이 봉안하고 풍어제 및 용왕굿을 행해왔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영정이 철폐되고 당우는 1976년 국동어항단지 조성사업으로 해체되었다. 1980년 향토민속문화보존회가 당의 옛터에서 풍어제의 재현을 계기로 1982년 현 당우를 복원, 영정을 봉안하여 다시 풍어제가 열리고 있다. 이곳의 풍어제는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집에디터2019.05.29 14:16구례 지리산 오미리와 운조루 원경, 구례군청 제공 풍수(風水)란 무엇일까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온 말이다.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겨울에는 북서풍이 드세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많다. 이 바람을 피하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곳이 풍수 명당이다. 국어사전에는 "집, 무덤 따위의 방위와 지형이 좋고 나쁨과 사람의 화복(禍福)이 절대적 관계를 지닌다는 학설, 또는 그 방위와 지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 뒤편에는 산이 있어야 좋고 앞쪽으로는 물이 흘러야 좋다는 배산임수의 원리들이 여기서 나왔다. 모두 땅에 대한 관념과 철학이자 과학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풍수를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풍수를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모두 유기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풍수의 기본 원리다. 대학교의 지리학과에서 풍수를 배우고 건축이나 환경...
편집에디터2019.05.22 15:03광주 광산구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명창 임진택의 판소리 토크콘서트 '오월의 노래' 한 장면. 광산구 제공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 (사)들불열사 기념사업회 제공 사람들이 모여든다/ 휑하니 널려있는 공동묘지/ 찬바람이 몰아치는디/ 무거운 걸음으로/ 두리번거리며 모여든다/ 어느 외진 무덤 앞에 서더니만/ 사진 두 개를 세워 놓는디/ 한사람은 대학 학사모 청년이요/ 또 한 사람은 앳띤 여고생 차림이라/ 그 앞에다 젯상을 차려놓고/ 신방에 쓸 이불이며/ 혼례복을 널어놓고/ 무녀 한 사람 나오더니/ 넋이야 넋이로다/ 두 사람 영혼을 불러내니..../세마치장단의 판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영혼결혼식을 읊는 대목이다. 불러낸 영령은 누구실까? 신랑은 광산출신 윤상원이요 신부는 보성태생 박기순이다. 윤상원이라. 너무나도 잘 알려진 5.18의 상징적 인물이다. 계...
편집에디터2019.05.15 13:061963년 목포 가족계획 계몽공연-목포예총 제공 유행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질문이 적절치 않다. 유행가는 특정한 시기에 대중의 인기를 얻어서 많은 사람이 듣고 부르는 노래다. 이 풀이를 적용한다면 유행가 없는 시대가 어디 있겠는가. 시경의 풍요(風謠)으로부터 향가, 고려가요, 근대기의 가요, 지금의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행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박하게 장르의 하나로 호명했던 것은 근대기 대중가요부터다. 대중가요는 창가로부터 시작한다. 창가(唱歌)는 갑오개혁 이후에 발생한 근대음악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악곡의 형식을 빌려 지은 간단한 노래라고 풀이한다. 쉽게 말하면 전통 방식이 아닌 서양식 노래 전반을 이르는 말이다. 이후 남도지역에서는 '노래'를 범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까지 했다. 현지취재를 다녀보면 민요를 포함한 근대기의 노래를 창가로 호명하는 예들을 볼 수...
편집에디터2019.05.08 13:371963년경 목포예술제 공연 장면-목포예총 제공 목포 최초의 극장은 어디일까 연극 혹은 공연이란 호명으로 소환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상은 근대기 극장이다. 1904년 목포 복만동의 '목포좌'를 주목한다. 목포에 처음으로 들어선 근대적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목포좌는 운영 미비로 1908년 없어진다. 같은 해 상락동에 '상반좌'가 설립된다. 1914년에 증축하여 138평 규모에 이른다. 1929년 허가기간 만료로 문을 닫는다. '상반좌'가 폐쇄되기 이전, 무안동에 활동극영화 상설극장으로 '희락관'이 설립된다. 1926년 화재로 없어진다. 1927년 희락관 자리에 상설 활동극장인 '평화관'이 등장한다. 설립당시 목포극장과 평화관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목포극장은 183평 규모, 수용정원 510명, 평화관은 86평에 정원 353명이었다. 식민시기 평화관은 다다미 관람석에 방석을 깔...
편집에디터2019.05.01 14:401-진달래화전-이애섭 의례음식장 제공 봉채떡은 왜 만들까찹쌀 3되와 붉은 팥 1되로 찰시루떡을 했다. 2켜다. 중앙에는 대추 7개를 둥글게 돌리고, 그 가운데 밤 하나를 놓았다. 떡시루의 술이 바깥원이요 안으로는 팥이 원이며 7개의 대추가 또한 원이다. 찹쌀의 흰색을 더하니 마치 여러 개의 원이 겹을 이룬 듯하다. 사과에 비유해본다. 사과껍질이 떡시루의 술이라면 안으로 꽃받기가 있고 씨방이 있으며 배(씨앗)가 있다. 감을 잘라본다. 외과피(껍질)가 있고 중과피, 내과피로 이어져 씨앗이 들었다. 시루 가운데 밤 한 톨을 놓으니 마치 이러한 과실과 씨를 닮았다. 하나의 큰 씨앗을 형용한 것이리라. 이를 봉채떡 혹은 '봉치떡'이라 한다. 봉차(封茶)라는 말에서 왔다. 결혼하기 전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채단과 예물을 보내던 의식, 차(씨앗)를 보내던 의례다. 지금도 남도 일부 지역에서...
편집에디터2019.04.24 11:32아열대 식물부터 오래된 나무로 잘 가꿔진 고흥 소록도 중앙공원과 구라탑(求癩塔). 고흥군제공이층창집의 세레나데, 그 총각은 어느 곳에서 알콩달콩 늙어갈까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층 창집이었다. 무슨 노래였을까? 정확한 기억은 없다. 그는 맞은편 염선화(가명)씨의 방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기타 소리였지만 그런대로 들어줄만한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컨츄리 음악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였으니 한국동란 직후였을 것이다. 컨츄리 소울, 컨츄리 록 음악 등이지 않았을까? 이때만 해도 세레나데를 실행한다는 것이 무척 어색하지 않았나. 무슨 대학을 다녔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창문 틈사이로 내리쬐던 춘사월의 햇살들 뿐이다. 천연덕스럽게 딴 짓을 하는 척했지만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곤 했다. 세레나데...
편집에디터2019.04.17 15:19목포시 목포신항에 세월호가 바로 세워져 있다. 뉴시스 범피중류(泛彼中流), 인당수에 이르는 역설의 미학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라/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삼강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요량헌 남은 소리 어적이었만은/ 곡중인불견의 수봉만 푸르렀다~(후략) 산천경계를 읊어 내려가는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전혀 비장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귀신들을 불러내어 대화하기도 하고 죽음 이후의 일들을 열거하기도 하는 의미심장한 노래다. 심청을 실은 남경장사들의 배가 망망한 바다를 떠나가는 풍경, 범피중류(泛彼中流)의 첫 대목이다. 죽음을 앞 둔 심청이의 심경을 읊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송광록이 제주도에서 소리공부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뱃전에 앉아 착상한 노래다. 갈까마귀와 귀촉도는 곧 일어날 심청의 죽음을 지시한다. 하지만 삼산...
편집에디터2019.04.10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