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년 전 양동교회 모습. 한식 기와로 지어졌다. 이돈삼 |
양동교회 전경. 1910년에 지은 석조건축물이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이돈삼 |
정명여학교에 세워져 있는 독립기념비.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을 기념해 1985년에 세웠다. 이돈삼 |
양동의 상징이 양동교회다. 선교사 유진벨이 1897년에 세웠다. 반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목포는 뭍과 섬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기에 좋았다. 때맞춰 목포항도 열렸다. 교회는 양동의 언덕에 천막을 치고 시작됐다. 목포는 물론 전남 개신교의 시작이었다. 자연스레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가 됐다.
양동교회는 1900년에 한식 기와로 지어졌다. 신도들이 계속 늘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윤식명 목사가 초빙됐다. 호남의 첫 조선인 담임목사다. 미국인 선교사가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인이 세운 자립교회가 됐다.
교회 한쪽에 선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고 씌어 있다. 지금의 교회는 191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자들이 직접 유달산의 돌을 옮겼다고 전한다. 직사각의 예배실을 만들고, 가운데 휘장을 경계로 남녀 신도실을 나눴다.
왼쪽 출입문 위에 태극문양과 함께 ‘大韓隆熙4年(대한융희4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융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4년은 순종이 통치하던 마지막 해를 가리킨다. 1910년이다. 오른편 문에는 옛 한글로 ‘쥬강생일천구백십년’이라고 씌어 있다. ‘주 강생’은 예수가 태어난 해를 일컫는다. 서기 1910년이다. 정면 출입문에는 돌조각에 십자가를 새겼다.
신도들은 이 출입문을 통해 예배당에 드나들었다. 왼쪽 문은 남성, 오른쪽 문은 여성들이 이용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교회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신도심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양동을 떠났지만, 교회는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목포개신교의 자부심이다.
양동교회는 근대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였다. 선교사들은 지역의 의료와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선교사 오웬이 의료활동을, 스트레퍼는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지역주민과의 거리감을 없애는 방편이었다. 유진벨이 이름을 ‘배유지’로 바꾼 것도 그런 연유다.
스트레퍼는 1903년 여학생 10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했다. ‘목포여학교’다. 1911년엔 ‘정명여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석조건물을 지었다. 3년 뒤에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의 학교설립 인가를 받았다. 정명여학교는 호남의 첫 여성교육 기관이다. 일제의 감시망도 비교적 느슨했다. 선교사들 덕분이다.
정명여학교는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양동교회와 함께 목포 만세운동의 가온누리가 됐다. 학생들은 교장 김아각(다니엘 커밍) 선교사로부터 독립선언서, 결의문 등을 전달받아 시위를 준비했다. 태극기는 한문교사이면서 양동교회 장로였던 곽우영이 그려준 원형을 본떠 만들었다.
1919년 4월 8일 학생과 교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양동교회의 종소리가 신호탄이었다. 시민들도 참여했다. 만세 함성과 태극기 물결이 목포시내 전역으로 퍼졌다. 목포의 만세운동이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정명여학교 학생과 양동교회 신도들이 많이 구속됐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갇혔는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임시휴교를 했다. 1920년부터 22년까지 정명여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한 이유다. 목포4·8 만세운동은 또 다른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박연세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붙잡혀 가 순교했다. 공생원을 세워 고아를 돌본 윤치호도 양동교회의 교역자였다.
양동교회 신도들은 70년대 민주화 투쟁에도 앞장섰다. 5?18민주화운동 때엔 기청목포청년연합회 깃발 아래에 모였다. 그 일로 고통받은 이들을 돕는 일도 거들었다. 양동교회는 지금 기장과 예장으로 나뉘어 있다. 기존 양동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는 양동제일교회가 됐다. 양동제일교회는 정명여학교 정문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만세운동 소식을 담은 지하신문과 독립선언서, 결의문 등이 발견됐다. 1983년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의 천장을 보수하는 과정에서다. 학교에 독립기념비가 세워졌다. 선교사 사택은 1912년 목포에 지어진 첫 번째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80년대까지 사택으로 쓰였다. 지금은 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정명여중?고교에서는 해마다 4·8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를 잇는 도로가 ‘만세로’, 골목은 ‘만세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민주화를 부르짖은 박승희도 정명여고를 다녔다. 박승희는 YMCA고교생 모임 활동을 하며,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전남대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91년 4월 29일 학내에서 ‘노태우정권 타도’ ‘미국 축출’을 외치며 분신을 했다. 현재 광주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정명여고 후문 앞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박승희장학재단도 생겼다. 아버지(故박심배)가 딸의 민주화운동 보상금 전액을 기부해 종잣돈으로 삼았다. 정명여고와 전남대 동문들도 힘을 보탰다. 장학재단은 해마다 정명여고와 전남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가수 이난영의 태 자리도 양동이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로 큰 인기를 누렸다. 박향림?장세정?이화자와 함께 걸그룹도 결성했다. ‘저고리 시스터즈’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다. 박향림은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가수다. 이난영은 자신의 딸과 조카 딸로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국에도 진출시켰다. 1959년의 일이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첫 걸그룹이다. K-팝의 씨앗이 됐다. 이난영은 삼학도에 수목장으로 모셔져 있다. 유달산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양동은 목포 근대화의 관문이었다. 개항과 동시에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문화가 들어왔다. 일제에 맞선 독립만세 운동의 본거지였다. 오늘날 맹활약하는 걸그룹의 태 자리다.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그 정신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목포 양동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