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홍원 교수 |
이번 이야기 역시 촛불에 대한 것이다. 이번 촛불은 역시 4대 비극이라 불리는 〈맥베스〉에서 나오는데, 비록 짧지만 많은 이들이 자주 읊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에서 나온다.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몇 행씩 끊어서 본다.
삼촌을 죽이고 폭정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맥베스에 반기를 든 군대가 던시네인 성으로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맥베스는 성의 방어에 신경을 쓰던 중 안쪽에서 들리는 여인들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원인을 파악하라고 보낸 시종은 "여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 말한다. 이에 맥베스는 다음과 같이 독백을 시작한다.
그녀는 이 이후에 죽었어야 했어.
그런 말을 할 시간은 따로 있었을 텐데.
죽음이라는 말을 할 시간이 따로 있었을 텐데…. 그것이 먼 훗날이어야 했는데 그녀가 너무 일찍 갔다는 말이다. 여기서 부인과 더 오랜 시간 같이 살고 싶었던 주인공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후 그의 생각은 '시간'과 삶에 대한 짧지만 깊은 통찰로 이어진다. '지금' 그녀는 죽었는데, 그렇다면 '내일'은 어떠한가?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은
하루에서 하루로, 이런 잔 걸음으로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기어가고
"잔 걸음으로 … 기어간다"는 말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듯 싶다. 매우 아름다운 운율이 이 부분에서 들려온다. '내일', 즉 '내' +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시간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한편 그것은 한 음절씩 극히 더디게 나아가는 "잔 걸음"일 뿐이다.
영어 원문으로 그 소리를 들어보면 그 효과는 더 아름답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번역으로는 두 음절(내-일)의 반복이지만 원문은 세 음절(to-mor-row)의 반복이라서 음절에서 음절로 옮겨 가는 '잔 걸음'의 느낌이 더 부각된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비극은 보통 blank verse로 쓰였는데 한 행이 열개의 음절로 만들어져 있고 운(rhyme)을 이루지 않아서 "blank verse"(운이 없는 시행)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문제의 행은 세 음절 단어 tomorrow가 세 번 반복되고 한 음절인 and가 두 번 반복되어 총 열 하나의 음절로 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한 음절 초과된 것으로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을 담아낸 듯하다.
우리의 모든 어제들은 광대들에게 먼지 가득한 죽음의
길을 비춰주고 있구나.
'내일' 이야기가 있었으니 '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인생의 과거가 보여주는 것은 광대(인간)들이 조명 받아 죽음(먼지, 흙)으로 가는 길이다. 기독교 신화에서 인간이 흙 으로부터 빚어졌음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이 고작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Out, out, brief candle!" 촛불과 같이 짧고 위태로운 생명력에서 인생의 덧없음이 더욱 느껴진다. 이 가냘픈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은 이어 실체가 없는 그림자, 연기가 서툰 배우에 비유된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한 시간 동안
뻣뻣하게 걸으며 투정부리듯 대사를 한 후 다시는
연기를 못할 형편 없는 배우.
풀이하면, 배우는 그가 맡은 역을 흉내만 낼 뿐, 그것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어설프게 연기할 뿐 그 역을 진짜로 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내세의 삶이 진짜요 이 세상의 삶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기독교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합성된 세계관이 담겨 있다.
맥베스는 더 나아가 인생을 요란하지만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라고 한다.
그것은 백치가
말해주는 이야기야.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의 극단적으로 허무한 버전이다. 비유를 다 걷어내고 골자만 남긴다면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메시지이다.
이 독백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인생의 덧없음을 말할 때 인용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작가는 20세기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인데 "Out, Out—"라는 시의 제목은 독백 중 짧은 촛불의 비유에서 차용된 것이다.
미 동북부의 산골에 있는 벌목공장에서 생긴 일을 이야기하는 이 시의 주인공은 어른이고 싶어하는 한 소년이고 이야기의 악당은 으르렁 거리며 나무를 잘라내고 있는, 의인화된 전기톱이다. 어른의 일을 하지만 속으로는 아이일 뿐인 이 소년은 실수로 손을 전기톱에 대게 되고(시에서는 전기톱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잘린 손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을 시킬 수 없었던 가족과 친지들은 아이를 둘러서서 조금씩 맥이 약해지는 것을 지켜본다. "Little, less, … nothing. And that ended it."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이 시의 결말은 충격적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 죽은자가 아니었기에 하던 일로 돌아섰다." 어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어느 소년의 허무한 죽음. 그에 더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골의 일상에 전제된 죽음의 그림자. 맥베스와 같이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 프로스트의 멋진, 가슴아픈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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