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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불헤집는 '비땅'은 내 유년의 내면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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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불헤집는 '비땅'은 내 유년의 내면을 여는 열쇠다

비땅에 대한 명상
내게는 불멍보다 비땅 장단이 훨씬 익숙하다.
부삭 안으로 소사리를 들이밀면서, 부숭 모서리를 북장구 삼아 두드리는 일이 낙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익힌 음악적 리듬감은 아마도 우리집 부숭을 두드리던 비땅장단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불현듯 비땅을 소환하는 마음이 생동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풍경들이 주마등을 이룬다.

게재 2022-07-21 15:12:56

석양 깊은 골짜기, 헛간의 오래된 부삭(아궁이), 쇠여물 솥에 불을 '달멘다'. 덜 마른 '등걸'은 송진을 피식피식 토해내면서도 불을 품는 성정이 그윽하다. 웬만한 바람 따위로는 이 진득한 화염을 방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빼짝(바싹) 마른 '뜽컬'은 그리 진득하지 못하다. 그저 제 몸 하나 태울 화력이라고 할까. '등걸'을 켜켜이 쌓아 불을 지피는 것을 '달멘다'고 한다. 오래된 우리 고향 말이니 이 정도 설명은 해두어야겠다. 고사한 나무뿌리 땔감을 '뜽컬'이라 하고 일반적인 장작을 '등걸'이라 한다. 솔잎 땔감을 '소사리'라 한다. 강강술래의 '남생이놀이'를 천렵(川獵)놀이로 재해석한 이유가 여기 있다(지난 칼럼 참고). 땔감 구하러 산에 가는 것을, 흔히 '나무하러 간다'고 한다. '뜽컬'은 발로 차서 '메꼬리(망태기)'나 '꺼렁지(삼태기)'에 담고, 소사리는 갈쿠(갈퀴)로 긁어 원통형으로 쌓아 묶는다. 이것을 '소사리뭇'이라 한다. '뭇'은 짚이나 채소, 생선 따위의 묶음을 세는 단위다. '줌(한줌)'의 열 배에 해당한다. 소사리뭇을 묶어놓고 먼 거리에서 낫을 던져 꽂히게 하는 놀이를 '낫치기', '낫꽂기', '낫걸이'라 한다.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했던 전국의 초동들에게 익숙한 놀이였다. 알심(힘) 있는 화력은 이 소사리불이다. 버르르 타버린 듯해도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비땅'으로 헤집어보면 안다. 잿빛이 된 소사리의 잔해들 아래, 쏘삭질할수록 벌건 불의 알들이 속살을 드러낸다. 제 몸만 태워 불꽃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 타버린 재를 또다시 태워 불을 품는 성정(性情)이라고나 할까. 뜽컬이나 등걸은 '달메'지만 소사리불은 켜켜이 쌓을 수 없으므로 달멜 수 없다. 그저 부넘이(아궁이에서 온돌고래로 불이 넘어가는 곳)로 검은 연기를 내보내며 소사리를 보충할 따름이다. 이때 필수적인 도구가 비땅이다. 부지깽이의 우리 고향말이자 전남 방언이다. 내 기억 속의 부지깽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쓰는 도구를 훨씬 넘어선다.

비땅 장단에서 '불멍'이라는 명상까지

오랜만에 <전라도닷컴>에 칼럼 하나를 썼다. 시군단위의 저널들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동문화>, <전북문화살롱> 등과 더불어 남도의 대표성을 갖는 월간지다. 게재한 글의 제목이 '비땅'이었다. 그것을 여기 풀어쓴다. 부삭(아궁이)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집기도 하고 쏘삭질하는 데 사용한다. 요즘 '불멍'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장작불을 보며 멍하게 있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라 한다. 흐르는 물을 보며 멍하게 있는 것은 '물멍'이라 한다. 산멍, 들멍, 계곡멍, 바다멍 등 무수한 신조어들이 가능하겠다. 그만큼 일상이 복잡다단하다는 역설이리라. 어쩌면 사찰에 들거나 요가원에 들어 명상하는 것보다 알심있는 현실적인 '명상'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게는 불멍보다 비땅 장단이 훨씬 익숙하다. 한뭇 풀어 부삭(아궁이) 안으로 소사리를 들이밀면서, 부숭(부뚜막) 모서리를 북장구 삼아 두드리는 일이 낙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노래를 좋아했던지, 이게 내 고향 진도지방의 어떤 특성인지, 내 집안의 내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육자백이나 흥타령, 아니 그 이전의 흥그레타령을 입에 달고 사시던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누나가 입에 달고 부르던 이미자의 노래들 하며, 김정호의 발라드풍 노래들이 대상이었던 듯하다. 대중가수 김정호나 심지어는 김광석마저도 육자배기의 틀거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내 주장(본지 칼럼 참고)은 이런 내 이력에 기반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삭에 불을 달멜 때마다 비땅은 장구 두드리는 궁채와 열채가 되고 드럼을 두드리는 스틱이 된다. 비땅으로 부숭을 두드리며 유창하게 노래를 쏟아내다 보면 어스름 깊어져 부엉이 울고 이내 쇠죽이 끓기 시작한다. 내가 익힌 음악적 리듬감은 아마도 우리집 부숭을 두드리던 비땅장단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 어머니의 부숭으로부터, 아니 더 근원적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동굴에서 지피던 화톳불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임 연령이 지난 여성들에게는 아궁이불 쐬는 것이 자궁 관련 질환의 억제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앉을개(깔고 앉는 널빤지)를 깔고 불을 지피는 자세가 자궁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른바 온열요법이기 때문이다.

비땅의 용도가 어찌 불을 지피는 기능뿐이었겠나. 때때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으로 옮겨지면 회초리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느 시기 쇠비땅을 쓰게 되긴 했지만 때때로 도깨비 이야기 속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고 갑자기 출현한 해충이나 뱀을 쫓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물론 구렁이가 출현하는 경우에는 업신(業神)이라고 해서 스스로 움직여주기를 기다린다. 족제비나 두꺼비 등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구렁이가 출현하면 흰죽을 쑤어 깨끗한 그릇에 담아서 구렁이에게 주기도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어린이나 여성의 몫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설화 환경이 대개 이런 범주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공간으로 치면 부뚜막이나 쇠죽방 아랫목 등이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도깨비 이야기 중 하나가 빗자루 혹은 부지깽이다. 밤새 씨름을 하고 왼발을 걸어 넘어트려 큰 나무에 묶어두었는데 아침에 가보니 몽당빗자루나 비땅이 묶여있더라는 그런 얘기 말이다. 여기서 몽당빗자루의 '몽당'과 '비땅'의 '비(부이, 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 남근 모티프에서 출발한 남성성의 화신이다. 주목할 것은, 이 이야기의 발화자가 남성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과 수용층이 여성이나 어린이라는 점에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에서 이를 남근 모티프로 읽고 우리 사회문화사를 분석한 바 있다. 오늘 말하는 비땅은 물론이려니와 설화 담론 자체를 문화사적 의미로 읽어내지 않으면,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인 것을 원형으로 오해하게 된다. 숨은 이데올로기 등의 문화적 장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불현듯 비땅을 소환하는 마음이 생동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풍경들이 주마등을 이루다니, 아마도 비땅은 유년의 내면을 화들짝 열어젖히는 열쇠인가 보다.

남도인문학팁

비땅과 불에 대하여

비땅이라는 호명은 내고향 진도뿐 아니라 서남해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 전역에서 사용해온 말이다. 완도에서는 비떼이, 광양이나 여천지역에서는 부작대기, 부작댕이, 장성지역에서는 '부이땅'이라 한다. 남도 전 지역에서 '부자지'라 부르는 것같기도 하다. 남성 생식기에 대한 호명과 '불'이라는 합성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지'의 옛말은 '슈신'이다. '신(神)'이 호명의 배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어로는 '주장군'이라 한다. 이를 태양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원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체에 남아있는 용어 중에서 고환을 말하는 '불알(붕알)'이나 '붓꽃(불꽃)', 여성 생식기 주변을 말하는 '불두덩' 등이 모두 '불의 씨'나 '태양의 알'에서 비롯된 호명이다. 비땅, 부이땅, 부지땅, 부뚜막이나 부시막, 부싯깃, 부삭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불과 연관되어 있다. 남도 전 지역에서 사용하는 '화나다'라는 뜻의 '부애나다' '부아나다'도 마찬가지다. 모두 '불' 즉 '화(火)'나 '열(熱)'과 관련되어 있다. 불은 다스리고 조절해야 한다. 음양론의 불 자체가 다스려야만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비땅은 남성성을 다스리는 회초리 아니었을까? 산속 암자에 들어 다스리는 명상도 필요하겠지만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명상이 긴요하다. 장마 습기 때문에 집안이 눅눅한데, 말려둔 낙엽뭇 풀어 불 지피고, 비땅 장단에 노래 한가락 불러봐야겠다. 어디 그윽한 명상이 따로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