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 활시위처럼 마을 둘러싼 수백년된 팽나무·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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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 활시위처럼 마을 둘러싼 수백년된 팽나무·느티나무
함평 초포마을||고려 건국 참여 이언 시조(始祖)||함평 이씨가 주축이 되어 거주||종손 3대가 함평향교 전교 맡아||1987년 마을 진입로 공사현장서||동검 등 청동기 유물 26점 나와
  • 입력 : 2021. 11.18(목) 16:17
  • 편집에디터

비트. 색깔이 빨갛다고 '빨간 무'로도 불린다. 이돈삼

김장의 손길을 기다리는 배추밭. 배추가 튼실하게 자랐다. 이돈삼

벼 수확을 마친 들판이 황량해졌다. 볏짚을 한데 뭉쳐놓은 곤포 사일리지가 허전함을 조금 덜어줄 뿐이다. 단풍 든 나뭇잎은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산하가 초겨울을 향하고 있다. 튼실하게 자란 배추와 무, 비트 등 남새는 김장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스산한 바람이 서성거리는 들판과 나란히 이어져 있다. '나비'로 이름을 널리 알린 전라남도 함평군의 나산면 초포리다. 함평이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다. 불갑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해보천이 고막원천과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초포리는 초포, 사촌, 환곡, 사산, 입석 등 5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옛날에 작은 포구가 있던 곳이라고 초포, 모래밭이 있었다고 사촌, 옥(玉) 고리의 모양새라고 환곡, 뒷산이 활처럼 생겼다고 사산, 선 돌이 있다고 입석으로 이름 붙었다.

함평이씨 유적비와 마을유래비.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함평이씨 유적비와 마을유래비.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마을 입구에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함평이씨의 시조 이언의 13세손 이순지가 520여 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고 새겨져 있다. 지난 2005년에 세워진 표지석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530년이 넘었겠다.

그 옆으로 정자가 있다. 왼편으로는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흡사 활시위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빨갛게 단풍을 연출한 나무들이 아름답다. 그 길도 멋스럽다.

함평이씨 선조들을 추모하는 공간인 사산사. 이돈삼

마을 한복판에 사산사(射山祠)가 자리하고 있다. 함평이씨 선조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추모하는 사당이다. 함평이씨는 고려 건국에 참여해 신무위대장군에 오른 함풍군 이언을 시조로 하고 있다. 5세 이광봉은 고려 충숙왕 때 함풍부원군에 봉해졌다. 10세손 이춘수가 함평에 터를 잡았다.

극진한 효행과 높은 학덕을 지닌 11세손 이접이 '효우공'으로 불렸다. 이접의 손자 13세손 이순화․이순지가 사산마을에 들어와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효우공파를 열었다.

이순화가 만호를 지냈다. 그의 집이 '만호공종가'로 불리는 이유다. 그때 지은 집을 후손들이 지키며 대를 이어 살아왔다. 지금의 '이건풍 가옥'이다. 초포리에 정착한 함평이씨의 종가이다.

이규행가옥의 안채. 기둥 등 주요 자재가 본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돈삼

이건풍가옥. 초포리에 정착한 함평이씨의 종가이다. 이돈삼

이규행가옥에서 만난 수세미. 이돈삼

이규행가옥의 안채. 기둥 등 주요 자재가 본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돈삼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이 여러 차례 고쳐지고 지붕이 개량됐다. 하지만 높은 기단과 목재 등이 옛집임을 증명하고 있다. 건물은 안채와 사당, 헛간채로 이뤄져 있다. 사랑채 2동은 50여 년 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안채가 서쪽을 바라보며 ㄷ자형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우리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一자형의 구조와 큰 차이를 보인다. 독특하게 생겼다.

이재형, 이근행, 이건풍으로 이어진 종손이 모두 함평향교의 전교를 지냈다. 3대가 연이어 전교를 맡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전교는 지역에서 으뜸 가는 학자가 맡는다. 지위와 영향력이 수령 다음으로 높았다.

바로 옆에 이규행 가옥도 있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이충인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예전엔 꽤 규모가 있는 집이었다.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상량문에 적힌 연호로 볼 때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300여 년 가까이 됐다. 그럼에도 기둥 등 주요 자재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텃밭에는 속살을 내어 준 울금대가 베어져 드러누워 있다. 배추와 무가 여느 집보다 튼실하게 자랐다. 속이 꽉 차 보인다. 지역문화와 유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이건종이 오가며 관리하고 있다. 이건종은 여러 종류의 차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눠준다. 선조들의 나눔과 덕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다.

초포리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 유적이기도 하다. 1987년 2월, 사촌마을 진입로 공사현장에서 청동유물이 발견됐다. 인부들에 의해 발견되고 전문가들에 의해 발굴된 유물은 청동검을 비롯 세형동검, 창, 방울, 도끼, 장신구 등 26점이었다.

유적은 기원전 3~2세기에 만든 적석목곽묘였다. 깊이 판 땅에 목관을 놓고, 그 위를 돌로 채워 만든 무덤이다. 무덤과 부장 유물로 미뤄볼 때 제사장이고, 최고 권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발굴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규행가옥의 텃밭에 심어진 메리골드. 이건종이 꽃차를 만들 재료다

초포리를 품은 나산면은 조선시대에 모평현에 속했다. 1409년 인근의 함풍현과 모평현이 합해지면서 함평현이 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중심에 섰다. 강골촌으로 꼽는 3성(장성, 곡성, 보성)·3평(함평, 남평, 창평)의 거점이었다.

함평이씨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이칠헌, 이계동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계동을 비롯 이권범, 이도범, 이양범, 이인행, 이윤행, 이행록은 함평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함평이씨 효우공파의 제실 영사재(永思齋)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백야산 자락에 있다. 1804년에 처음 지어졌다. 묘는 이보다 300여 년 앞서 조성됐다. 그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배롱나무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나무의 키가 7m, 허리둘레 2m 남짓 된다. 두 팔을 벌려도 손끝이 서로 닿지 않을 만큼 굵다.

수령 500년이라고 안내판에 씌어 있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나무도 한 그루가 아니다. 수백 년을 산 나무 세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더 멋스럽다.

늦가을 서늘한 바람에서 초겨울의 내음이 묻어난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더 느긋해졌다. 초포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과 다소곳한 풍경이 길손의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준 덕분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아름다운 마을길. 단풍이 들어 더 이쁘다. 이돈삼

수확을 끝낸 울금밭. 속살을 내어준 울금대가 바닥에 눕혀져 있다. 이돈삼

배추와 비트가 심어진 논두렁 텃밭과 벼수확을 끝낸 논과 어우러지는 초포마을 풍경.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