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양식 장르와 혼성형태 활발… 공연 집단간 장벽 허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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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양식 장르와 혼성형태 활발… 공연 집단간 장벽 허물어
가극(歌劇)에서 악극(樂劇)까지||현재의 트로트 열풍이나||전통 소리 기반의 융합||명실상부한 協律 분위기가||역설적으로 판소리에 대한||주목·관심 불러내는 것 유사
  • 입력 : 2021. 11.11(목) 16:43
  • 편집에디터

중국 연변 창극단 출범식. 이윤선

전통적인 판소리나 그 형식을 빌려 만든 가극(歌劇)을 창극(唱劇)이라 한다는 점 지난 연재에서 소개해두었다. '소리극', '뮤지컬' 등을 포괄한다. 하지만 '판소리극'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판소리를 기저 삼고 있는 노래극인데 왜 판소리를 걸어 호명하지 않았을까? 판소리 발생 300여년, 창극 발생 100여년, 수많은 호명들이 이 장르를 수식했다. 민요창극, 악극, 가극, 가곡, 국극, 여성국극 외에 딸딸이, 포장극장, 나이롱극장, 약장수극장 등을 포함 시킬 수 있다. 그 시초에 협률사라는 100여 년 전의 구성물이 있다. 20여년 전 내가 진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노래극을 만든 적이 있다.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졸고, 「민요창극을 통해서 본 지역문화콘텐츠 포지셔닝-진도에 또 하나 고려 있었네를 사례로-」(공연문화연구, 2006)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극본은 고 곽의진 작가에게 맡기고 작곡은 유장영 감독에게 맡겼는데, 내 의도는 판소리가 아닌 진도의 민요를 매체 삼아 연극을 꾸며보자는 것이었다. 고 주호종 감독(정읍시립국악단)의 도움이 매우 컸다. 방송 등 언론에서는 전문 소리꾼들이 아닌 민간인들의 참여라는 점과 민요를 극으로 만들었다는 지점들을 주목해주었던 것 같다. 당시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기념 초청공연까지 이루어졌으니 제법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2021년 올해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이 되었다. 민요창극 초청공연 이후, 어떤 토대를 다지고 또 어떤 변화들을 가져왔는지 궁금하다.

민요창극에서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까지

민요창극이라 이름 붙인 이 실험에서 나는 두 가지 접근을 하였다. 하나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장소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지면상 다른 것은 생략하고 극의 매커니즘만을 소개해둔다. 창극의 절충주의적 주장(앤드류 킬릭)에 의하면, 창극은 주변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어느 면에서는 비정상적으로 한국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창극이 논란을 일으키며 지역이나 계층적 기원의 구분을 중시하지 않고 국악의 전 영역을 접목시킨 첫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 연극적 내용을 고안하기에 필요한 국악

삼별초 국악오페라-목포예술회관. 이윤선

레퍼토리의 어떤 것이라도 사용될 수 있는 지점까지 판소리의 음악적 절충주의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시도하기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창극의 발생 초기부터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속예술 전반의 노래 예컨대 풍물이나 민요 따위를 매체 삼은 연극이 그 대상이었음을 추정하게 해준다. 판소리만을 표현 매체 삼지 않고 전통음악의 문법을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창극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할까. 아니 그것보다 사실은 내가 사회극이라 이름 붙인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윷놀이 등이 이미 극적 장치들을 수천 년 수만 년 축적해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극 혹은 소리극으로 표방되는 이 범주의 시원을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이 사회극의 자발적 서사를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으로 이론화시키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혹은 도발적으로 일어난 죽음 등의 사회적 손실에 대해, 나아가 일시에 당하는 슬픔, 분노 등의 상실감에 대해 사회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의례적 기제(機制, 기계적으로 구성되어있는 조직이나 공식 따위의 내부 구성)라는 것이 내 이론의 핵심이다. 연극이니 제사니 예술이니 의례니 따위의 연행들은 이 영육간 치유를 위해 고안된 사회극이라는 뜻이다. 준비되지 않은 불시의 상황에 안타고니스트(손실의 객체)가 출현하여 프로타고니스트(손실의 주체)와 갈등 및 풀이의 서사를 꾸리고 종내는 손실의 보상을 얻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고향 어르신들은 이 의례에 나타나는 일종의 훼방꾼을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라고들 해왔다. 매우 즉흥적인 돌발행위로 보이는 이것이 사실은 수만 년 인류가 고안해온 치유의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기회가 되면 이 이론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하겠다. 따라서 창극의 발생사를 얘기할 때, 민요창극이니 소리극이니 하는 주장과 시도들이, 창극은 반드시 판소리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병존해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나 신파극 영향설을 주로 주장해왔던 창극 발생이나 기원설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가극(歌劇)에서 악극(樂劇)으로

최승연의 '악극성립에 관한 연구(어문논집, 2004)'를 빌리면, 악극은 1930년대 대중극의 한 종류로 발생하여 크게 성행하였다. 이 당시 불리던 '가극'이라는 용어에는 모든 음악극 양식을 포괄하여 창가를 주음악적 재료로 사용한 음악극, 오페라, 창극은 물론, 신파극단들이 당시 유행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만든 음악극 모두를 '가극'이라 했다. 1940년대 들어서면서 '악극'은 독립된 양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악극'과 '가극'이 창극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 금용웅은 '1920년대 중후반 판소리와 창극의 전개양상'에서 장르간 혼성공연형태를 분석한 바 있다. "서양음악과의 혼성형태, 연극, 강연, 영화, 댄스, 마술과 같은 장르가 함께 공연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는 192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전통음악 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이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이런 일련의 변화를 공연집단 간 기존의 계층이나 신분의 벽을 넘어서게 되는 효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정충권은 '20세기 초 극장무대 전통공연물의 향유방식'에서, 전통시대 공연자 및 관객의 신분별, 계층별 장벽이 허물어져 일종의 평등성을 구현했다고 평가한다. 또 전통공연물이 실내의 극장무대 위에 놓임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감각적 향유를 경험하게 했다는 점, 예술상품으로써 소비적으로 향유되었으므로 그 나름대로 공연예술사상 오늘날 대중적 향유에 해당하는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판소리와 창극이 1910년대 이후까지 변화하고 존속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마치 현재의 트로트 열풍이나 각종 방송국을 통해 연행되는 전통 소리 기반의 융합, 한편으로 말하면 명실상부한 협률(協律)의 분위기가 역설적으로 판소리에 대한 주목과 관심을 불러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남도인문학팁

판소리, 창극, 가극, 악극 전환기

김민수의 논고를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극장에서 전통공연예술이 점차 사라져가던 1915년 3월 판소리 명창들의 주도하에 전통공연예술인들의 단체인 경성구파배우조합이 결성되었다. 일제가 시정오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경성구파배우조합은 물산공진회에서 판소리와 창극을 두루 공연하였다. 판소리는 주로 전속기생들이 공연했던 극장무대와는 달리 명성있는 대명창들이 연주하였고 창극은 이전까지 극장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공연하었다. 이후 경성구파배우조합은 구극 즉 창극에 신극을 함께 공연함으로써 흥행을 주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신극단체와 더불어 신구극개량단을 조직하여 공연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신구극개량단에 의한 배우조합의 활동은 점차 신극에 치중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구파배우들이 설 자리를 잃고 단체를 떠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구파배우들이 떠난 경성구파배우조합은 신극단체만이 남아 활동하다가 마침내 와해되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