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누가 진짜 '악의 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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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의 음악세상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누가 진짜 '악의 축'인가
노래 ‘America'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 영화 <바이스(Vice)>
  • 입력 : 2019. 05.23(목) 13:53
  • 편집에디터

영화 포스터.

중동의 페르시아만 일대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또다시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5월, 2015년 체결한 '이란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EU가 이란에 부과한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 합의다.

1년여가 흐른 지금 이란은 지난 8일을 기준으로 향후 60일 내 금융, 석유제재를 풀지 않으면 핵합의 일부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추가제재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면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양국 모두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중동 전역에 친미, 친이란 성향 무장단체가 얽혀 있어 작은 충돌이 순식간에 중동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이란의 공식적인 종말'을 거론했고 모하마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B팀'에 들들 볶인 트럼프 대통령이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 다른 침략자들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하려고 한다."며 조롱조로 응수했다. 여기서 말하는 'B팀'이란 베냐민(Benjamin)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 이란에 매우 적대적이며 이름에 알파벳 'B'가 포함된 미국과 중동의 주요 인사들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존 볼턴(Bolton)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이른바 '네오콘(신 보수주의자)'으로 지칭되는 미국 정, 관계의 '매파(강경주의자)'들이 있다.

부자와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나라

2001년 9월 11일, 딕 체니 미 부통령은 대통령 비상상황센터에서 두 대의 항공기가월드트레이드센터(WTC) 건물에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는 대통령의 승인 없이 위협으로 판단되는 항공기를 격추하라고 명령한다. 모두가 공포와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딕 체니는 새로운 기회를 보고 있었다.

영화 <바이스>는 전작 <빅쇼트>를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실상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파헤친 아담 맥케이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2018년 작이다. 영화는 국방부장관 출신으로 부시 행정부의 부통령 자리에 오르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갖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딕 체니의 삶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1963년 미국 와이오밍주의 캐스퍼에서 시작된다. 청년 딕 체니(크리스쳔 베일 분)는 술과 도박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 린(에이미 아담스 분)은 콜로라도 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방황하던 딕 체니는 린의 도움으로 예일대에 입학하지만 학교보다 술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고 결국 그는 퇴학당한다. 린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다. 린은 어린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린은 명석한 야심가였지만 미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딕 체니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 한다.

닉슨 대통령 재임 당시 미 의회의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가한 딕 체니는 훗날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에 오르는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카렐 분)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헌신적이고 과묵하며 충성심이 강한 권력의 시종'을 원하던 럼즈펠드에게 딕 체니는 최고의 보좌관이었다.

소련과의 유화적 외교정책을 고수하던 정적 키신저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럼즈펠드는 국방장관에 오르고 딕 체니는 역대 최연소 백악관 수석에 임명된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일시적으로 위기에 빠지지만 자신의 고향인 와이오밍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미국은 부자와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나라였고 딕 체니의 세상이었다. 카터대통령 재임 당시 추진되었던 진보적 법안들은 모두 폐기되었고, 딕 체니는 공화당 하원회의 의장의 자리에 오른다.

1980년 당시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학살되고 있었다. 광주의 민중들은 미국이 나서서 신군부의 학살행위를 막아줄 거라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있었다.

"국내 상황에 대한 전두환의 부정적인 분석과 북한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 입성을 위한 포석일 뿐이다." 5·18 직전이었던 1980년 5월13일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전두환을 만난 후 미 국무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그러나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6월21일, "전두환 장군과 그 동료들이 한국 정부에 대한 군부 통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로 보고서의 기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이 한국의 군사쿠데타와 민중학살을 묵인한 것에 이어 전두환을 '한국 최고지도자'로 인정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남한에 들어서는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강경하며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기조라면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한반도 남쪽 어느 도시에서의 학살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조용한 사람들

미국 의회의 한 연회에서 딕과 린 체니는 만취한 조지 W.부시를 보게 된다. 그는 당시 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의 아들이었다. 그 역시 청년 시절 마약과 술에 찌들어 살았지만 아내 로라 부시의 독실한 신앙심과 눈물의 호소에 회심한 후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의 부시와 딕 체니의 모습이 상당히 닮아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에 오르자 딕 체니는 국방장관에 임명되고, 퇴임 후에는 거대석유기업이며 군수업체를 자회사로 둔 '핼리버튼(Halliburton)'의 CEO 자리에 오른다. 석유와 무기, 핼리버튼은 전직 국방장관을 내세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탐욕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딕 체니는 조지 W.부시(아들 부시)의 대선캠프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부시의 런닝메이트로서 합류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즉답을 피하며 몸값을 올린 후 관료의 감독 및 군 지휘권, 에너지와 외교정책에 대한 권한을 조건으로 대선캠프에 합류한다. 부시는 그것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조지 부시와 딕 체니는 앨 고어 후보와의 대결에서 불과 537표 차이로 승리하며 백악관 입성에 성공한다. 국방장관 럼즈펠드를 비롯한 딕 체니 부통령의 측근들이 백악관과 펜타곤(국방부)의 요직을 장악하면서 대통령이 오히려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현재 트럼프의 대북정책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 있는 존 볼턴 역시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함께 딕 체니 측 인사로서 국무부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보수 언론 역시 딕 체니의 편에 서서 그의 정책을 홍보하는데 앞장섰다. 딕 체니는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에너지정책을 폐기하고 부자감세를 단행하고 대기업규제를 철폐했다. 그리고 9.11테러가 발생했다.

딕 체니는 전시 대비를 위한 '단일행정부(The unitary executive)'라는 명분으로 전권을 장악한다. 정보기관들은 9.11테러를 오사마 빈 라덴이 중심이 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하지만 딕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은 배후에 이라크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확인 정보까지 채택하며 위기상황을 극대화한 그들은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통해 전 국민의 전화, 문자, 이메일을 영장 없이 감시한다. 박근혜 정부 당시 필리버스터를 포함한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이 이와 유사하다.

미국 전역은 분노에 들끓었지만 적의 실체가 모호했다. 그들에게는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적국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전쟁의 대상은 이라크였다. 미국 행정부는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학살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을 '확증(스모킹 건)'으로 밀어붙였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조용한 사람을 조심하라. 그는 남들이 떠드는 동안 지켜보고 남들이 행동하는 동안 계획하고 마침내 남들이 쉴 때, 공격을 개시한다."

역설적이게도 '조용한 사람'들은 우리가 지칠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가 쉬는 동안 우리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에게 무관심해 질 때만을 기다린다.

악의 축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마치 전쟁게임처럼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대다수의 선량한 바그다드 시민들은 밤새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같은 시각 딕 체니와 그의 가족들은 한가로이 승마를 즐기고 있었다. 부시의 승전선언이후 딕체니가 몸담았던 '핼리버튼'사는 수의계약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중이라는 의혹의 근거였던 나이지리아와의 우라늄 거래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미군은 설상가상으로 이라크내에서 대량학살무기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들이 밝혀낸 것은 사담 후세인과 그의 가족이 미국영화와 코카인을 좋아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포함한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이라크 침공 다음해부터 핼리버튼의 주식은 500%가 올랐다. 딕 체니가 얼마의 사의금을 받았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딕 체니는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지만 심장이식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다. 그의 딸 리즈 체니는 와이오밍주의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최근 한 언론에서 북한의 비핵화 달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를 보이며 북한 경제를 완전히 고립, 파탄시킬 수 있는 최대 압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선의 해결책은 전쟁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듯하다.

"이라크전 미군전사자는 4550명, 부상자는 32325명이었으며 2001년 이후 미군자살률은 31% 증가했다. 이 전쟁으로 이라크 민간인 6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ISIS(이슬람국가)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민간인 15만명을 사살했고 국제 테러로 2천명 이상을 살해했다."

부시 미 대통령은 반테러전쟁의 표적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언급하며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했다. 영화 '바이스(Vice)'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부통령을 의미하는 Vice President와 함께 '악(惡)'의 의미도 담고 있다. 영화 '바이스'의 감독은 왜 딕 체니의 삶을 다룬 영화에 '악(vice)'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지금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진짜 '악의 축'은 과연 누구일까.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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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