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난을 증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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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의 음악세상
당신의 가난을 증명하라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음악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입력 : 2019. 04.11(목) 10:42
  • 편집에디터

영화 이미지

미국의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빌런인 타노스는 자신의 고향 행성인 타이탄이 '거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간파한다. 타이탄 행성은 급속도로 자원이 고갈되는데 비해 인구수가 줄어들지 않아 결국 종말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타노스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제거하자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타이탄족의 멸망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우주 전체 생명체의 절반을 소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을 모은 후 이를 실행에 옮긴다.

헐리우드 영화에는 타노스와 유사한 캐릭터가 종종 등장한다. 영화 '킹스맨'에서 사무엘 L.잭슨이 연기하는 리치먼드 발렌타인은 자신에게 동조하는 일부 권력자와 부유층만을 남기고 인류를 절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의 주장 역시 비경제활동인구의 과잉으로 지구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설정은 영국의 경제학자 겸 신학자인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주장한 이른바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즉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결국 인류는 필연적으로 멸망한다'는 이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맬서스의 주장은 19세기 영국에서 크게 호응을 얻으며 빈민구제법 등에 영향을 주었고 많은 학자들 역시 그의 이론에 동조하였다. 맬서스는 여전히 인류가 유지되고 있지 않느냐는 반론에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인해 높은 사망률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올리버 트위스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산업혁명 당시 영국 빈민가의 비참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빈원(救貧院)에서 태어난 직후 보모가 있는 분원에 보내졌던 올리버(바니 클락 분)는 열 살이 되자 다시 구빈원으로 보내진다. 집단 노동에 동원되는 이 곳의 아이들에게는 간신히 연명할 만큼의 죽이 배급된다.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선출된 한 명이 식사를 좀 더 달라고 청해보기로 하고, 올리버는 급식 책임자에게 말한다.

"조금만 더 주세요.(I want some more)."

올리버를 끌고 온 책임자에게 원장은 말한다.

"이 녀석의 목을 매달아야겠군.(That boy will be hang)"

5파운드에 한 장의사의 일꾼으로 보내진 올리버는 남은 개밥을 먹고 관 옆에서 잠을 잔다. 그 곳에 먼저 와 있던 일꾼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데 격분한 올리버는 주먹을 날리고, 장의사 주인은 죽만 먹여야 하는데 고기를 먹여서 아이가 폭력적으로 변했다며 몽둥이로 때린다. 결국 올리버는 몰래 이 곳을 빠져 나온다.

7일 밤낮을 걸어 70마일 거리의 런던에 도착한 올리버는 거리의 한 구석에 쓰러져 있다. 이 모습을 본 소매치기 소년 아트풀 도저는 올리버를 런던의 뒷골목에 있는 자신들의 소굴로 데려간다. 그 곳의 우두머리 페이긴(벤 킹슬리 분)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시켜서 먹고 산다. 올리버를 데리고 거리로 나간 아트풀 도저는 어느 신사의 손수건을 훔치다 들키자 올리버에게 이를 덮어씌운다. 올리버는 경찰에 붙잡혀 재판정에 끌려가지만, 그가 도둑이 아니라는 서점 주인의 증언으로 풀려난다. 손수건을 도둑맞은 노신사 브라운로우는 갑작스런 고열로 쓰러진 올리버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간다. 그는 올리버에게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며 자신의 집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올리버를 신뢰하는 브라운로우는 수표를 쥐어주며 서점에 심부름을 보낸다.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될 것이 두려운 페이긴은 아이들을 시켜 올리버를 끌고 오게 한다. 자신을 믿고 돌봐준 브라운 로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올리버는 소매치기 소굴을 벗어나려 하지만 페이긴은 그를 골방에 감금한다.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국의 한 고아 소년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인생역전을 이뤄내는 성공스토리와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구도는 이후 수많은 문학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영국의 부유층과 빈민가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촘촘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엄마는 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구조되어 구빈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올리버를 낳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구빈원은 당시의 구빈법(救貧法, Poor Law)에 근거해 설립된, 지방정부의 한 단위인 각 구빈구가 자체의 비용으로 빈민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수단을 지원하던 시설이었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비용의 충당을 위해 극심한 단순 노동에 동원되었고, 소설과 영화 속 올리버와 같은 어린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구빈원에서 행해지던 갖은 학대와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경제학자이자 신학자였던 맬서스 역시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와 빈민들의 비참한 삶을 보며 번민하고 고뇌했다. 그는 '인구론'에서 빈민의 인구 증가를 억제해 식량 생산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구 억제의 방법으로 전쟁, 기아, 질병처럼 사망률을 높이는 '적극적 억제'와 출산율을 낮춰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예방적 억제'를 제시했다. 물론 맬서스는 예방적 억제를 권장했고, 효과적인 피임법이 없었던 당시에는 결혼을 늦추거나 출산을 자제하도록 빈민을 계몽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층은 맬서스가 적시한 '적극적 억제'에 더 주목했다. 빈민 구제나 사회 복지가 자칫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죽을 조금만 더 달라는 올리버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거나, 고기를 먹였더니 폭력적으로 변했다며 매질을 하는 자본가들이 맬서스의 주장을 입맛대로 해석한 사람들이다. '후손들은 제한된 양의 식량을 두고 투쟁할 것이다'는 맬서스의 이론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로 연결되었고,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한 이들의 이론은 모두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으로 악용되었다.

21세기형 스크루지들

부산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이동호 부산시의원은 "환경미화원 연봉이 왜 이렇게 많냐"고 발언했다가 논란이 되자 사과했다. 그는 "왜 이렇게 환경미화원의 연봉이 올라갔나. 우리 시의원보다도 월 100만 원이 많다"라고 했다. 그가 문제 삼은 환경미화원의 임금은 18년 동안 근무한 환경미화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종 수당과 성과상여금 등이 포함된 금액이었다. 시의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보통 환경미화원이라고 하면 열악한 급여를 받고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일하는 사회적 약자로 인식된다. 환경미화원이 대학을 졸업해야 하거나 치열한 시험을 치르고 경쟁을 뚫고 들어오는 일은 과거에 거의 없었다."

이 시의원은 '청소나 하는' 환경미화원의 월급이 자신보다 많은 사실이 불쾌했던 것 같다. '열악한 급여를 받고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일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가 너무 많은 임금을 가져가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다.

찰스 디킨스의 또다른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 속 스크루지는 부자이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구두쇠였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에는 책을 좋아하는 순하고 착한 소년이었지만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인해 힘겹게 성장하면서 돈이 인생의 최우선이자 목적이 되었다. 젊은 시절 결혼을 전제로 만난 연인마저 돈만 아는 그의 곁을 떠난 이후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간다.

그의 유일한 부하직원인 봅 크래칫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가난하다. 사장인 스크루지는 1주일에 15실링밖에 주지 않고 한겨울에도 일하는 중에 난로에 석탄을 넣지 못하게 한다. 봅은 애가 일곱이나 되는데다 자식들 중 소아마비를 앓는 아들 팀 때문에 항상 걱정이다.

크리스마스 날, 7년 전에 죽은 친구 말리의 유령이 스크루지를 찾아온다. 스크루지 못지않은 구두쇠였던 말리는 사후에 탐욕의 사슬을 몸에 감고 세상을 방황하는 벌을 받고 있었다. 그는 스크루지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보내 사후 세계에 대해 경고하며 이제라도 뉘우칠 것을 권한다.

'가난하냐 죽고 싶을 만큼 묻고 또 묻고는, 죽지 않을 만큼 줘요.'(2019.04.01 경향신문)

한 중앙일간지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는 과도한 서류 요구와 불쾌한 현장 조사 등 끝모를 '가난의 증명' 요구에 힘겨워 하는 174만여 기초수급자들의 실상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에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공짜로 받아먹는 건 창피한 일이다. 공돈 타 먹으려면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였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 속 '21세기형 스크루지'들의 속마음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이 기아나 전염병, 심지어는 전쟁 등으로 사라져 주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믿는 신 맬서스주의자들인 듯하다. 경제적 지위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무작위로 절반의 소멸을 도모한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속 타노스가 지구인은 아니지만 차라리 더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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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