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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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의 음악세상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sbs 드라마 ‘녹두꽃’ 주제가, 구전민요)
  • 입력 : 2019. 05.09(목) 11:10
  • 편집에디터

동학농민혁명 소재 SBS 드라마 '녹두꽃'단체 포스터. SBS 제공

"19세기말 조선은 지배층의 타락과 외세의 간섭으로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었다.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정사를 내팽개치고 부정부패와 수탈을 일삼았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탄식이 사방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한탄하기를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이라 하였다." (드라마 '녹두꽃' 중)

사람, 하늘이 되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과 이방 백가(박혁권 분)는 공생관계이다. 백가는 아전의 권세를 악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군수는 재물을 상납 받는 조건으로 이를 묵인한다.

백이강(조정석 분)은 서자도 아닌 얼자(孽子)다. 백가가 겁탈한 여종의 소생으로 태어난 그를 사람들은 '거시기'라고 부른다. 그는 부친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데 앞장선다. 1893년 계사년, 장터에서 그를 맞닥뜨린 전봉준은 이름을 물으며 말한다.

"살생부든 묘비든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묻는다."

백가는 군수 조병갑에게 만석보(萬石洑)의 물 사용료를 조세로 징수함이 부당하다며 등소를 올린 전봉준을 백대의 장형(杖刑)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이미 장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군수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면서도 뇌물을 상납하는 백가의 전횡을 막지 않는다.

백가의 사주를 받은 군수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린다. 쌀이 왜(倭)로 방출되는 것을 막겠다는 구실로 마을의 쌀을 독점하기 위함이었다. 고부 백성들의 궁핍은 극에 달한다.

백가는 가난한 아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치부(致富)에 사활을 거는 목적 중 하나는 신분의 상승이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적자 백이현(윤시윤 분)의 과거급제를 위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권력 실세들에게 상납한다.

백이현은 부친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통한 조선의 개화를 꿈꾼다. 척사(斥邪)의 신념을 가진 스승 황석주(최원영 분)는 백이현에게 묻는다.

"진흙탕 속에서 살찐 비단잉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황석주는 양반이자 동학교도였다. 조선 철종때인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정립된 동학은 민족 고유 사상인 경천사상(敬天思想)을 바탕으로 그 위에 유, 불, 선(도교)의 교리를 혼합하여 만든 민족종교 사상이다.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곧 하늘과 같고,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도주의를 주장했다.

전봉준을 만난 백이현은 동학농민군의 야만을 지적하며 자신의 개화론을 재차 피력한다. 훗날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의 조정은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의 개입을 요청했다. 한반도는 주변 열강들의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진짜 야만은 문명을 앞세워 약소국을 물어뜯는 열강들이라고 말하는 전봉준은 이미 조국의 참담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다. 극 중 백이현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고부군수 조병갑은 익산으로 전출된다. 신임군수는 방곡령을 해제하고 만석보의 이른바 '물세'징수를 폐지한다. 위기를 느낀 백가는 조병갑을 다시 불러들일 계략을 꾸미던 중 신임군수가 동학교도임을 알아내고 그를 협박한다. 결국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다시 부임한다.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통해 혁명의 개시를 알린다. 항일의병활동과 3.1운동,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10 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혁명의 뿌리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라도 보부상들의 대부였던 도접장 송봉길의 딸 송자인(한예리 분)은 이 사발통문을 입수한다. 첩보를 밀고하기 위해 관아로 향하는 길에 바가지에 담긴 감자 두 개를 빼앗긴 채 어린 아들을 붙들고 울고 있는 아낙과, 어린 아이들과 아내를 이끌고 구걸을 하고 있는 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착한 관아에서는 조병갑과 탐관오리들이 질펀한 연회에 빠져 있다. 송자인은 고뇌에 빠진다.

최근 국민들을 분노케 한 세 종류의 연회가 있다. 유명연예인, 재벌 3세 등이 연루된 강남 클럽에서의 환각파티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고 알려진 한 별장에서의 연회, 그리고 이른바 '고 장자연 사건'으로 불리는 언론사 사주일가와 권력자들의 '회식'이다. 성접대, 마약, 성추행 및 폭행 등 온갖 추한 범죄에 법무부, 검찰, 경찰, 언론, 재벌 등 한국의 핵심권력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에 국민들은 아연실색했다. 결국 연예인 몇 명이 구속되는 선에서 이 사건들은 망각의 커튼 뒤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송자인을 만나게 된 전봉준은 말했다. "누군가에게 지옥이 누군가에겐 극락이 될 수 있다."

1894년 갑오년 음력 1월 10일, 고부 말목장터에 횃불을 들고 모인 백성들의 모습에서 2016년 겨울의 광화문광장이 떠오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은 동학농민군 장두 전봉준의 별칭이다. 떨어진 녹두꽃을 슬퍼하며 울고 갔을 수많은 청포장수는 이름 없는 '거시기' 들이었다. 백가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치명상을 입지만 '거시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전봉준의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힌 그는 성난 민중들에 의해 효수될 처지에 놓인다. 농민군의 장주 전봉준은 '대의보다 복수에 집착하는 군중에게 혁명은 실패로 복수한다'며 그의 오른손을 내려찍은 후 외친다. "이제 '거시기'는 죽었다. 너는 이제 '백이강'으로 살라."

'거시기' 역시 마음속에 하늘을 품은 존엄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인내천(人乃天)'의 정신이다. 삶이 다시 주어진 '거시기' 백이강이 어떤 과정을 통해 각성하게 될 지 궁금하다. 그것이 신분사회를 넘어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인권을 갖는 근대사회를 열어가는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석보(萬石洑) 그리고 4대강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에 의해 폭파되는 만석보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기 흐르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저 보를 쌓을 때 백성들이 흘린 눈물이다. 진짜 거사는 이제 시작이다."

역사의 물줄기는 아무리 틀어막으려 해도 그 보를 뚫고 도도히 흐른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4대강 보 해체를 위한 다이너마이트를 빼앗아서 문재인 청와대를 폭파시켜 버리자"고 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계파가 세운 대통령은 무려 22조 8천억 원의 혈세를 투입해 수십만 년을 흘러 온 4대강을 막무가내로 파헤쳤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투입될 예산은 예측하기조차 어렵다. 이에 부화뇌동한 이른바 '전문가'와 기업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지금도 강물은 하루가 다르게 썩어간다. 110억원대 뇌물수수와 350억원대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된 당시의 대통령은 현재 조건부로 보석된 이후 재판을 받고 있다.

그에 이어 이들이 내세운 후보는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임기 4년 만에 탄핵되었다. 촛불로 세워진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5년간은 자숙하며 반성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당시의 총리는 지금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되어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 이에 분노한 170여만명의 국민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자유한국당 해체'를 요구하자 원내대표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급기야 '다이너마이트로 청와대를 폭파하자'는 선동이 등장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낸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도모하지만 내란혐의가 씌워질 것을 우려한 진사 황석주는 이에 반대한다. 현지를 찾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역시 전봉준의 주장에 단호한 제동을 가한다. 당당하게 고부에 재입성한 백가는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싹 다 털려버렸으니 이제 다시 수금을 좀 해 볼까."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경제계 원로들을 만난 자리에서 협치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만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은 헌법파괴적 행위이므로 이들 세력과의 타협은 불가하다고 했다. 국정농단의 주역들은 자신들을 궤멸시키려 한다고 항변하고, 보수언론은 대통령이 협치를 걷어찼다고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이루지 못했다.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 모두 미완의 혁명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적폐세력은 군사독재의 부역자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매국노, 자국의 백성을 죽이기 위해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조정과 부패한 관료들에게까지 그 뿌리가 이어져 있다.

촛불혁명 역시 학술적으로는 혁명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무력을 통해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주류를 교체함으로써 체재를 개혁하는 것이 혁명의 요건임에 비추어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평화로운 방식으로 정권을 교체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의 혁명이 진행 중이다.

역사가 2016년을 또다시 '촛불운동'으로 기록할지 혹은 '촛불명예혁명'으로 기록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동학농민혁명 소재 SBS 드라마 '녹두꽃'. SBS 제공

서울 종로구 전옥서 터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동상 .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