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의 도자이야기>청자와 자태를 겨루다, 흑(黑)과 백(白), 그리고 적(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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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욱의 도자이야기
한성욱의 도자이야기>청자와 자태를 겨루다, 흑(黑)과 백(白), 그리고 적(赤)
  • 입력 : 2019. 05.07(화) 11:34
  • 편집에디터

01-흑유장고(국립중앙박물관)

청자와 자태를 겨루다, 흑(黑)과 백(白), 그리고 적(赤)

고려시대 자기는 발생부터 소멸 때까지 청자가 중심을 이루며 발전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유입된 차문화의 본격적인 확산과 이에 따른 다완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청자가 가장 널리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당나라의 육우(陸羽; ?~804)는 당시까지의 차문화를 정리한『다경(茶經)』이라는 책에서 청자와 백자 등 여러 재질의 다완 가운데 청자를 가장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 이의 영향으로 청자는 고려시대 가장 사랑을 받았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비색(翡色)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릇의 다채로운 기능과 다양한 용도, 개인적 취향 등에 따라와 백자와 흑자, 붉은색의 동채(銅彩) 청자 등도 함께 생산되고 유통되어 고려 도자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이들 자기들은 청자에 비해 수량은 많지 않으나 고려 청자가 쇠퇴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생산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고려 백자는 바탕 흙의 철분을 완전히 제거한 흰색의 고령토에 투명한 유약을 시유한 것으로 대부분 두께가 얇다. 그리고 대체로 무늬가 없으나 음각과 양각, 상감으로 시문한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처음 자기가 발생할 때 배천 원산리와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등의 중서부 지역은 중국의 영향을 직접 받아 벽돌 가마를 운영하면서 청자와 함께 다완을 중심으로 백자를 왕성하게 생산하였으나 이후 청자가 중심을 이루면서 백자는 소량 생산되었다. 이는『다경(茶經)』에서 백자를 청자 다음의 우수한 다완으로 꼽고 있으며, 개인적 취향에 따라 백자를 선호하였던 소비층이 있어 꾸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중국에서 자기를 수입하여 다완으로 사용하였던 신라에서도 청자가 수입 자기의 중심을 이루며 백자는 일부 확인되는 것에서도 청자가 매우 선호되고 백자는 일부 소비층에서만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백자를 만들려면 철분 등 불순물이 없는 바탕 흙과 유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원료의 선정과 이를 바탕 흙으로 만드는 수비 과정 등에서 철분 등의 잡물을 완전히 걸러내야 양질의 백자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원료의 채취와 바탕 흙의 제조에 많은 시간과 인력 등의 경제력이 소모되기에 때문에 청자를 선호한 시대적 배경도 있으나 경제적 측면도 백자 생산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백자는 왕실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생산 과정에 많은 경제력이 소모되는 재질이었던 것이다. 백자는 강진을 비롯한 남서부 지역 요장에서 만들지 않았으나 청자 기술이 강진으로 집약되는 고려 중기에는 강진에서도 소량 생산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연질로 제작되어 중국 백자에 비해 선호도가 낮았다. 따라서 주 소비충이 분포하고 있던 개성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서는 경질의 중국 백자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강진에서 생산되는 백자는 초기 백자보다 자화(瓷化)가 완전히 되지 않아 대부분 연질이다. 유약은 대체로 아주 얇게 시유되었으며 그릇과 완전히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져나간 사례들도 확인된다. 이와 같은 한계도 있으나 백자의 기형은 청자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고려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조형성은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중서부 지역에서 처음 만들었던 초기 백자보다 제품의 완성도와 기술력이 퇴보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는 청자와 일부 흑자 생산을 중심으로 요장을 운영하였던 강진에서 새로운 재질의 백자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중서부 지역과 다른 원료의 한계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 안정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에서 유리하였던 것이다. 즉, 일부 소수 기호층만을 위해 소량 소비되는 백자를 자체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하여 유통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며, 대중적 인기 상품인 청자 발전에 기술력을 집약하여 발전시킬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흑자(黑瓷)는 청자와 백자 등 주류를 형성하였던 다양한 그릇들 가운데 가장 이례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릇 겉면에 입혀져 있는 유약은 다른 그릇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흑갈색 계통의 어두운 색을 띠고 있어 더욱 이채롭다. 흑자는 옛 문헌에 따르면 오잔(烏盞)과 오자기(烏磁瓷), 오기(烏器), 오자(烏瓷), 석간주(石間硃)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근대 이전에는 까마귀의 특징인 검은 날개를 뜻하는 '오(烏)'를 검은 색으로 혼용하여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흑자는 자기가 발생하면서 함평 양재리와 해남 신덕리, 강진 용운리, 장흥 픙길리, 고흥 운대리 등의 서남부 지역 요장에서 전통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진흙 가마를 운영하면서 청자와 함께 소량 생산하였다. 이들 흑자는 저장 또는 운반 용기의 병과 호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완과 발, 접시 등의 음다(飮茶)와 일상 생활용기인 반상기(飯床器)를 중심으로 생산된 청자와 뚜렷하게 비교된다. 또한, 흑자는 자기를 만드는 점토보다 도기를 만드는 점토를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도기 양식을 수용하여 만들고 있어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검은 빛을 지닌 흑자(黑瓷)는 바탕 흙을 기준으로 정리하는 자기의 분류 기준에 의하면 흑자라고 할 수 없다. 즉, 태토에 산화철이 함유된 고려 흑자는 현재 확인되지 않으며, 검은 색을 지니고 있다는 넓은 의미에서 흑자로 개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려 흑자는 철분이 약간 들어가 있는 청자 바탕 흙 위에 산화철이 섞인 분장토를 전체적으로 덧씌운 다음 청자 유약을 바른 철채청자(鐵彩靑瓷)와 청자 바탕 흙 위에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유약을 시유한 철유청자(鐵釉靑瓷)를 포함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청자로 분류할 수 있으나 바탕 흙이 반드시 자기를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흑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흑자는 전통적인 병과 호 등의 그릇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다완도 일부 생산되어 지배층의 위세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흑유 다완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복건성(福建省)에서 생산된 흑유 다완은 '건잔(建盞)'이라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고려에서도 이러한 유행과 함께 건잔이 유입되었으며, 강진에서도 이를 생산 유통하여 강진 월남사 등의 소비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흑유 다완을 요구하는 지배층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소량 생산하였으나 품질도 우수한 청자에 비해 떨어져 백자처럼 중국에서 수입된 흑자가 많이 유통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개성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서 품질 좋은 경질의 흑자가 많이 확인되고 있다. 즉, 중국 흑유 다완을 사용하는 일부 수요층을 위해 소량 흑자를 소량 생산하였으나 역시『다경(茶經)』의 영향으로 청자가 소비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흑유 다완을 비롯한 일상 생활용기의 생산은 감소하고 저장 또는 운반 용기 중심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다.

한편, 청자나 백자의 그릇 겉면에 산철화 안료를 이용하여 무늬를 그린 다음 청자 유약을 시유한 철화청자(鐵畵靑瓷)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며 고려시대 많이 제작되고 널리 사용되었다. 철화기법은 그릇 겉면에 간편하게 무늬를 그릴 수 있으며 비교적 쉽게 안료를 구할 수 있어 오랫동안 이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철화청자는 비색을 갖춘 강진에서도 일부 생산되고 있으나 해남 진산리 생산의 청자 가운데 장고와 화분, 대반(大盤) 등의 특수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우수한 조형을 지닌 청자에서 대부분 확인되고 있어 위세품적 성격의 그릇에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장고는 철채나 철유도 일부 있으나 대부분 철화로 무늬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 수량도 많아 권위적이며 특수한 위세품 가운데 철화청자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는 청자이다. 철화청자는 청자의 제작 기법상 난이도가 있는 투각청자나 상감청자 등의 뚫거나 파서 무늬를 표현하는 각기법(刻技法) 청자에 비해 그릇 겉면에 안료를 이용하여 무늬를 그리는 난이도가 낮은 화기법(畵技法) 청자의 대표적 청자로 인식되어 대체로 예술성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비색청자에 비해 품질이 낮지만 특별한 그릇으로 소박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흑갈색의 다양한 색감은 청자와 백자 등 다른 자기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한 멋을 풍기고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움을 완성하여 새로운 개성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철화백자는 회화성을 갖추면서 다양하게 생산되었는데, 전라남도에서는 특히 담양지역에서 백자 바탕 흙 위에 석간주라는 이름의 철유를 시유한 흑자가 조선 후기에 많이 생산되었다. 이들 흑자는 고려시대와 같이 병과 호 등의 저장 또는 운반 용기기 중심을 이루고 있어 그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색을 지닌 동채청자(銅彩靑瓷)와 동화청자(銅畵靑瓷)는 산화동을 이용하여 표현한 청자로 흑자처럼 바탕 흙 자체에 산화동이 포함되어 있는 사례는 없으며, 바탕 흙 위에 산화동이 함유된 화장토를 바른 다음 청자 유약을 시유한 동채청자와 산화동을 안료로 사용하여 무늬를 그린 다음 청자 유약을 시유한 동화청자가 확인되고 있다. 동채(동화)청자는 산화된 구리를 이용하여 붉은 색으로 표현하고 있어 진사청자(辰砂靑瓷) 또는 진사청자(朱砂靑瓷)로도 부른다. 산화동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낮은 온도에서 구운 연유도기(鉛釉陶器)인 당삼채(唐三彩)에 녹색의 안료가 사용되었으며,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지역에 위치한 장사요에서 생산한 청자에서도 산화동에 의한 녹색 무늬가 화인되고 있어 일찍부터 산화동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환원번조에 의한 붉은 색을 표현한 것은 고려 중기에 생산된 고려 청자가 처음이다.

산화동은 자칫 높은 온도에서 열을 흡수하면 불안정하여 안료가 기화(氣化)되어 날아가기 쉽고 불길과 바람에 따라 녹색으로 발색할 수 있어 아름다운 붉은 색을 표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붉은 색을 띠는 산화동은 청자 바탕의 청색과 보색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각적 효과를 위해 매우 한정적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동채(동화)청자는 보편화되지 한정적으로 생산되었으며, 전체 장식 가운데 일부나 상감 문양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오히려 큰 효과를 내도록 하였다. 즉, 우수한 기량과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야 구현할 수 있는 기법으로 기술력이 가장 뛰어난 청자 전성기에 일부 생산되고 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후기가 되면 갈수록 수량이 적어지며 동채청자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상감으로 그린 용의 눈을 찍는 등 아주 적은 부분에 일부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백자에 회화적 무늬를 그리는데 다시 사용되어 조선 후기에 철화기법과 함께 다시 등장하여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청자 가운데 매우 우수하며 만든 시기를 뚜렷하게 알려주는 편년 자료는 왕의 권위보다 높았던 무신집권의 최고집정자 최항(?~1257)의 강화 묘에서 출토된 국보 제133호 청자동화연꽃문표주박형주전자(靑磁 銅畵蓮花文瓢形注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표주박 모양의 몸통에 겉면은 연잎으로 둘러싼 형태이며, 꽃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주둥이를 덮고 있다. 잘록한 목 부분에는 동자가 연봉오리를 두 손으로 껴안아 들고 있는 모습과 연잎으로 장식하였다. 손잡이는 덩굴을 살짝 구부려 붙인 모양으로 위에 개구리 한 마리를 앉혀 놓았으며, 물이 나오는 아가리는 연잎을 말아 붙인 모양이다. 몸통의 연잎 가장자리와 잎맥을 빛깔이 뛰어난 동화로 대담하게 장식한 명품으로 비색과 어울려 그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청자 이외에도 백자와 흑자, 산화동을 이용한 동채청자 등을 생산하여 청자의 독창적 아름다움에 더하여 백화만발의 도자문화를 꽃피웠다. 문화의 다양성은 인류의 사고와 개념을 확장시켜 삶을 풍족하게 하였는데, 고려의 자기문화도 청자와 백자, 흑자 등의 다양한 요소를 통해 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도자의 미적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이를 창조하고 구현하였던 선조들의 열정적인 정서와 치열한 예술혼을 함께 느낄 수 있어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02-청자철채상감운학문매병(호림박물관)

03-청자철채양각동자문완(해강도자미술관)

04-청자철화버들문병(국보 제113호, 국립중앙박물관)

05-안산 매산리 고분 출토 중국 흑유완(경기도박물관)

06-백자음각국화문잔받침(용인대학교박물관)

07-백자상감모란버들문매병(보물 제345호, 국립광주박물관)

08-동해 삼화동 고분 출토 중국 백자(국립춘천박물관)

09-청자동채완(용인대학교박물관)

10-청자동화연화문주전자(국보 제133호, 호암미술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