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의 도자이야기>고려 청자의 새로운 교역로, 중국 태창(太倉) 번촌경(樊村涇)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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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욱의 도자이야기
한성욱의 도자이야기>고려 청자의 새로운 교역로, 중국 태창(太倉) 번촌경(樊村涇) 유적
  • 입력 : 2019. 11.26(화) 12:54
  • 편집에디터

01-유적 전경.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인류는 국가와 지역, 개인 등 상호간 다양한 교역과 교류를 통해 선진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교역은 전문화와 분업화를 통해 특화된 물품에 집중하도록 하고 발전시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체제로 인류는 일찍부터 이를 받아들여 적극 활용하였다. 고려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 적극적으로 교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려를 뜻하는 코리아(Korea)가 현재의 우리 나라 영문 표기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선진 문화의 중심지인 중국과 가장 활발한 교역을 실시하여 많은 물품을 주고 받았는데, 고려에서는 청자를 비롯한 다양한 물품을 수출하여 중국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중국에서 고려 청자는 정치적 중심지인 항주(杭州)와 북경(北京) 등의 수도(首都)와 교역의 창구였던 영파(寧波)와 태창(太倉), 봉래(蓬?) 등의 항구를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고려 정부는 절강성 영파와 강소성 태창, 산동성 봉래을 비롯한 여러 항구에 상선을 파견하여 적극적인 교역을 실시하고 대외진출을 왕성하게 시행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었던 남선 항로는 예성강에서 서해 연안 항로인 태안과 변산반도를 돌아 고군산도와 위도, 흑산도를 경유하여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의 남방지역인 영파 등에 이르는 길로 신안선의 항로가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 활동은 이외에도 원을 상대로 교역하였던 상인들을 위해 고려 정부가 발간한 어학 교재인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찍부터 중국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진 영파는 무엇보다 '해상 실크로드와 세라믹로드'의 거점 항구로 가장 대표적인 무역 상인인 '영파방(寧波幇)'의 원류이자 요람이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고승들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던 기항지로 고대 동북아 교역의 거점 지역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중국과의 많은 왕래를 상징하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설치되어 고려에서도 핵심적인 교역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관과 같은 시박사(市舶使)를 설치하여 동북아 무역을 관장하고 있어 그 중요성은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어 있다.

영파에서는 외성로(巍星路) 교장(?藏) 등 여러 유적에서 다양한 고려 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며, 당시 영파에서 수입한 고려 물품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즉, 1226년 나준(羅濬)이 편찬한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 시박조(市舶條)에 고려를 소개하면서 명주(明州, 영파)에서 수입한 물품을 양질품과 조질품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고려 청자는 조질품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청자가 조질에 포함되어 있어 있는 것은 사용 계층이 귀족층만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원대에는 1342년 왕후손(王厚孫)이 편찬한 '지정사명속지(至正四明續志)'시박조에 양질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220년대 조질품이었던 고려 청자가 이 시기 고급품으로 변화되어 교역이 더욱 활성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창이 원대 교역 도시로 알려진 것으로 2016년으로 강소성 태창시(太倉市) 번경촌(樊涇村)에서 원대(元代) 자기를 수출하던 대규모의 창고 유적이 확인되면서 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중국 자기들과 함께 고려 청자도 여러 점 확인되어 고려와 중국과의 교역이 영파와 봉래 이외의 지역에서도 실시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번촌경 유적은 옛 항로인 치화당(致和塘) 남안에 위치하여 있는데 서쪽에는 무릉교(武陵橋)가 있으며, 북쪽 끝에는 원대 경원(慶元, 영파)에 설치되었던 시박사의 태창 출장소 역할을 하였던 시박제거사(市舶提擧司)가 있었다. 동쪽에는 주경교(周涇橋)가 있으며, 다리 건너 남북으로 해신을 모시는 동악묘(東岳廟)와 천비궁(天妃宮)이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 교통과 운송, 통관, 기도 등 무역 도시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이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자료에 의하면 원대 태창에서 해운으로 곡류를 운송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명 초기에는 정화((鄭和, 1371~1434)의 대항해가 이곳에서 출발하고 있어 일찍부터 교역 도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번촌경 유적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많은 건물지와 함께 도로, 하천, 우물, 담장, 교량지, 구덩이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남북 방향의 고번경하(古樊涇河)를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동쪽은 두터운 벽체를 쌓아 여러 칸으로 나뉘는 큰 규모의 건물과 많은 자기 파편들이 확인되어 수출용 자기를 보관하던 창고 구역으로 판단되며, 서쪽은 부뚜막이 있는 건물들이 확인되며 일정한 규모로 건물이 밀집 분포하고 있어 주거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건물들은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원대 무역 도시의 구조와 기능 등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토 유물은 다양한 자기를 비롯하여 도기와 동기(銅器), 석기, 목기, 골기, 유리 제품 등이 확인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가운데 자기의 수량은 300여 톤에 이르러 태창의 규모와 함께 원대 무역 도자의 방대함을 알려주고 있다. 자기들의 생산지는 절강성의 용천요(龍泉窯)와 철점요(鐵店窯), 강서성의 경덕진요(景德?窯), 하북성의 자주요(磁州窯)와 정요(定窯), 복건성의 포구요(浦口窯)와 동장요(東張窯), 의요(義窯), 차양요(茶洋窯) 등이 확인되어 넓은 지역에서 자기들이 집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원대 중만기의 용천요 청자가 가장 많으며 적은 수량의 난백유(卵白釉)와 청화백자, 그리고 명대(明代)의 청화백자 등이 있다. 기종은 완과 접시, 잔, 반(盤), 병, 호, 주전자, 향로, 고족배(高足杯), 세(洗), 관(罐), 등(燈), 소조상(塑像) 등 40여 종이 확인되었다. 무늬는 화훼문이 가장 많이 확인되며 이외에 팔괘문과 용문, 초엽문, 쌍어문 등으로 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일부 그릇에는 '지원(至元) 4년(1338, 충숙왕 복위 6년)'을 비롯하여 '추부(樞府)'와 '복록(福祿)', '금옥만당(金玉滿堂)', '천하태평(天下太平)', '장명부귀(長命富貴)' 등의 글씨가 있어 창고가 운영되었던 시기와 당시 사람들의 염원과 바램을 잘 알려주고 있다.

이들 자기들은 생산 시기와 퇴적 상황 등을 비교 검토하여 원대 중만기와 원대 만기(晩期),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원대 중만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용천요 청자는 기형과 문양 등이 신안선에서 출수된 용천요 청자와 같거나 매우 비슷하며, '지원 4년(1338)' 명문이 확인되어 상호 비교 연구를 통해 무역 도자의 소비 실태와 유통 구조를 밝히는데 소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태창은 원대 항구 도시로 도자 생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이들 자기들은 교역을 위해 여러 지역에서 집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출토된 자기들은 대부분 사용 흔적이 없어 운반과 선적 과정에서 파손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일부 그릇들은 번조하면서 사용하였던 받침 등의 요도구가 남아 있어 생산과 함께 바로 이곳으로 운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보아 번촌경 유적에서 출토된 이들 대량의 자기 파편들은 오로지 상품으로 선적하기 위해 집산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영파 등과 함께 강남 지역에 운영하였던 자기 무역의 집산지 상황을 뚜렷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대 무역 도자의 중심을 이루었던 용천 청자가 생산지 이외의 유적에서 대규모로 확인된 사례는 많지 않다. 특히, 수량뿐만 아니라 그릇의 종류도 다양하여 무역 집산지의 특징을 잘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 다양한 용천요 청자의 편년과 시대를 대표하는 표준적 기형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 수중발굴의 효시가 되었던 신안선 출수 용천 청자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용천에서 태창까지의 중국 국내 운송 경로와 방법 등을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에서 원대 유적은 발견 사례가 매우 적은데, 특히 유적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도시 유적은 더욱 드물다. 번촌경 유적은 체계적인 도시 계획에 의해 대규모의 창고와 주거 건축이 밀집된 곳이며, 이에 더하여 항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부두와 이를 뒷받침하는 창고가 함께 확인되어 더욱 중요한 유적이다. 그리고 고려와도 교역이 이루어졌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번촌경 유적은 고려의 교역 도시와 무역 항구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적이다.

태창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고려 청자는 20여점으로 대부분 굽 바닥에 모래 받침을 받쳐 번조하고 있어 1340년대 고려 후기 생산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는 대몽항쟁의 여파로 원의 영향력이 고려에 절대적이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를 기회로 이용하여 대외활동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어느 때보다 해외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고려의 시장도 활짝 개방하여 많은 외국 상인들이 고려를 찾았다. 고려는 원 제국의 넓은 영토를 활용하여 시장을 넓혔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역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 왕실 등의 사행(使行)을 통한 육로 교역과 함께 해상 교류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태창 유적을 통해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다.

원대에 유입된 고려 청자에 대한 기록은 1342년 편찬한 '지정사명속지(至正四明續志)' 시박조에도 기록되어 있어 고려 청자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창이 위치한 강소성의 경우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등에서 이미 여러 점의 고려 청자가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에 고려 청자가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태창을 비롯한 강소성 지역에서 고려 청자가 확인되는 것은 고려가 중국의 많은 지역과 직접적으로 교역을 실시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앞으로 고려의 대외 교역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태창 번촌경 유적은 중국 무역사와 교역을 담당하였던 항구 도시 등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지만 교역의 상대였던 고려의 무역 도시를 연구하는데도 많은 자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무엇보다 원(元) 간섭이라는 역사적 역경을 극복하면서 세계 시장을 적극 개척하고 왕성하게 교역 활동을 전개하여 오늘날 코리아라는 이름을 남긴 고려인들의 역동성을 입증하는 유적으로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나라가 세계적인 무역 대국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토대가 되었으며, 앞으로 더욱 내실 있는 교역 강국이 되는데 중요한 기반되리라 판단된다.

02-유물 퇴적 상태.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3-유물 출토 상태.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4-용천요 청자음각차화(茶花)무늬'至元四年'명완.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5-청자상감국화무늬고족배.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6-상감청자상감구름봉황무늬대접.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7-청자상감구름무늬팔각접시.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8-청자상감학구름무늬잔.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09-청자상감갈대새무늬접시. 소주시고고연구소 연구소 제공

10-영파 외성로 교장 출토 청자음각연꽃무늬병. 영파문문고고연구소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