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은 형태와 무늬, 색상 등 3가지 요소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데, 이는 다른 도자의 감상에서도 으뜸으로 여긴다. 즉, 청자는 유려한 곡선과 균형을 갖춘 형태, 그 위에 표현된 자연을 담은 서정적 무늬, 마지막으로 형태와 무늬가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높고 깊은 가을 하늘을 품은 비색을 갖추어야 우수성을 인정받는다. 특히, 이들 요소 가운데 색상은 천하제일 "비색청자(翡色靑瓷)"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고려 청자의 형태와 무늬를 더욱 아름답게 비추어주면서 그 자신 또한 깊고 그윽한 아취를 품고 있어 무늬가 없어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고려 청자의 상징적 요소이다.
고려 비색청자의 아름다움은 고려의 기록보다는 당시 세계의 중심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에서도 그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천하의 명품이었다. 비색에 대해 가장 먼저 기록한 사람은 1123년(인종 1)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고 그 전 해(예종17년)에 돌아가신 예종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송나라 사절로 왔던 서긍(徐兢)이다. 그는 개경에 한 달 정도 머무르는 동안 고려에서 보고 느낀 내용을 귀국하여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견문록을 작성하였는데, 이곳에 비색청자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즉,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인 스스로도 독특한 비색의 아름다움에 대해 문화적 자긍심이 매우 높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은 1124년 완성되어 휘종(재위, 1100~1125)에게 진상되었는데, 휘종은 이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할 정도로 고려의 사정을 잘 정리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126년 금나라의 침략으로 송의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될 때 정본이 유실되어 1167년(의종 21) 서긍의 조카인 서천(徐蕆)이 집에 보관하고 있던 책자를 바탕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때 그림을 복구하지 못해 그림이 없는 도경이 되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이와 같이 사신들이 귀국하여 기록을 남기는 것은 방문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원래의 목적은 상대국의 지형과 지리, 문화 등을 검토하여 정치와 외교, 국방 등의 국가 전략을 수립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 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외교관들과 외국을 방문하는 공직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고려 청자의 아름다운 색상을 정리한 또 다른 대표적인 기록은 태평노인(太平老人)이 지은 '수중금(袖中錦, 소매 속에 간직할 귀한 것)'이라는 책 가운데 천하제일을 정리한 부분이다. 태평노인은 "건주(建州)의 차와 촉(蜀) 지방의 비단, 하북(河北)의 정요(定窯) 백자, 절강(浙江)의 칠, 고려 비색(秘色) 등을 천하의 제일로 정리하면서 다른 곳에서 따라 하고자 하여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자는 하북성 정요 생산품을 으뜸으로 여기면서 청자는 고려 비색을 제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 청자가 중국 청자와 다른 독특한 세련미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한 격찬과 함께 자연을 담은 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중국에서도 끊이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수중금'은 일반적으로 송대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내용 가운데 원곡(元曲, 원나라 때 만들어진 희곡 문학)의 내용이 있어 원대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비색 등 천하제일의 내용이 송나라 때 작성되어 원나라 때 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원나라 때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나라 때도 고려에 해당되므로 고려 비색청자가 천하제일로 꼽고 있을 정도로 제작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려 비색청자는 고려 사람들이 만든 독창적인 색상으로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색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중국에서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의 비색(秘色)과는 다른 독자적인 색을 만들어 그 아름다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비색청자의 푸르름은 빙렬(氷裂)이 없이 깊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맑고 투명하여 음각이나 양각 등의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 무늬와 장식을 간결하고 단아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이 맑고 투명한 유약은 흑백으로 그려진 상감청자의 무늬를 선명하고 밝게 보이도록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고려 청자가 우아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완성하게 된 데에는 맑고 투명한 절대적 조건인 비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약 아래에 무늬를 그리는 철화(鐵畵)나 퇴화(堆花) 등의 기법도 유약이 맑고 투명하지 않았다면 선명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고려 비색청자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나무를 베어 남산이 빨갛게 되었고 / 불을 피워 연기가 해를 가렸지 / 푸른 자기 술잔을 구워내 /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 / 선명하게 푸른 옥 빛이 나니 / 몇 번이나 매연 속에 파묻혔었나 / 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 / 단단하기는 돌과 맞먹네 /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似借天工術) / 가늘게 꽃무늬를 놓았는데 / 묘하게 화가의 솜씨와 같구나 / 쟁그랑하고 내 손에 들어오는데 / 가뿐히 우상같이 빠르네 / 유공(柳公權, 당나라 때의 서예가)의 은 술잔을 부러워 말게나 / 하루 아침에 변화하여 잃어버렸다오 / 깨끗하기는 시가(詩家)에 있는 게 알맞고 / 공교하기는 괴상한 물건인가 싶다 / 주인이 좋은 술 있으면 / 너 때문에 자주 초청하는구나 / 세 잔이니 네 잔이니 말을 말고 / 내가 흠뻑 취하게 해다오"
이규보는 영롱한 색상과 견고함, 아름다운 무늬 등 아취를 갖춘 청자 술잔을 예찬하면서 열에서 하나를 얻을 정도로 우수한 청자를 제작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는 천공술(天工術), 즉 하늘의 조화를 비리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감탄사를 남기고 있다. 이는 명품 비색청자가 탄생하기까지의 어려움을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정리한 내용으로 전성기 비색청자 생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 비색청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는지 아직 정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의 청자 제작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려 청자를 처음 생산하였던 중서부 지역의 대규모 벽돌 가마에서는 초벌이 생산되지 않았으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 신기술을 받아들여 나중에 청자를 생산하였던 강진을 비롯한 남부지역의 소규모 진흙 가마에서는 초벌구이가 확인되고 있어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으나 비색청자의 탄생에 초벌구이가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초벌을 통해 그릇에 남아 있는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유약을 바르면 날그릇에 유약을 입힌 것보다 유층이 고르고 안정되게 용융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벌구이만으로 비색청자의 모든 것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릇을 재번(再燔)하는 것은 한 번에 완성하는 것에 비해 많은 땔감과 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단번(單燔)에 비해 생산비가 많이 소요되는 단점이 있다.
강진 사당리에서는 비색청자가 등장하는 12세기 중기에 운영된 43호 요장에서 완벽한 초벌칸을 갖춘 가마가 확인되어 전성기 청자가 생산되던 시기에는 초벌구이가 정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은 초벌칸 구조는 고려 청자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국 절강성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월주요(越州窯)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구조로 남부지역 청자 가마의 독창적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강진 용운리 63호 요장 등의 고려 전기에 운영되었던 요장에서 초벌구이는 출토되고 있으나 초벌칸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비색청자와 초벌구이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벌과 비색청자와의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이 강진 사당리 23호 요장에서 확인된 초벌구이 전용 가마이다. 이 가마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대부분의 고려 청자를 생산한 곳으로 알려진 사당리에서도 고려청자박물관 주변의 핵심 지역에서 확인되어 비색청자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로 인식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초벌구이 전용 가마는 벽돌과 기와를 이용하여 타원형으로 축조하였는데 형태가 만두와 비슷하여 중국에서는 '만두형 가마'로 알려져 있다. 가마는 통풍구(가마 내부에 공기가 들어가는 통로)와 연소실(불을 때는 곳), 번조실(자기를 굽는 곳), 연도부(연기가 빠져나가는 곳) 등의 시설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특히, 연소실과 번조실 바닥에서 초벌 조각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 초벌구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였음을 뚜렷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만두형 가마는 중국의 경우 북송대에 운영된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청량사(淸凉寺) 여요(汝窯)와 남송대의 절강성 항주(杭州) 노호동요(老虎洞窯) 등 한정된 곳에서만 확인되고 있으며, 모두 황실에 청자를 공급하였던 공요(貢窯; 세금으로 도자기를 납부하였던 가마)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 송대 황실용 청자를 생산하였던 핵심 요업기술을 지닌 세력과 인적교류가 없이는 나오기 힘든 구조로 사당리 요장이 중국 황실용 청자 요장과 직접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요업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고려와 송의 문화교류가 매우 왕성하였으며, 청자 제작에서도 적극적이며 밀접한 기술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활발한 기술교류에 의한 바탕과 고려 장인의 각고의 노력으로 천하제일 비색청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실을 위한 요장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실패한 청자를 버린 폐기장의 규모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황실을 위한 그릇이므로 조그만 실수도 있어서는 않되므로 철저한 선별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던 것이다. 만두형 가마 주변에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청자를 폐기한 대규모의 청자 선별장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엄청난 수량의 청자 조각에 비해 가마에서 청자를 구울 때 사용하는 갑발 등의 요도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가마에서 1차 선별한 다음 이곳에서 다시 철저한 2차 선별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 출토품은 기린과 참외 등 동물과 식물의 형상을 본뜬 상형 청자를 비롯하여 청자 막새기와와 매병, 향로, 베개 등 다양한 비색청자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왕실을 위한 의례기와 위세품적 성격을 갖는 특수 용기를 비롯한 다양한 고급 용기 등이 이 일대에서 번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색청자가 생산되었던 전성기에는 조형적 측면에서도 중국과 많은 교류가 이루어져 여요에서 생산되었던 그릇들과 비슷한 향로 등의 청자들이 사당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만두형 가마가 확인된 사당리 23호 요장 일대가 고려 황실을 위해 최고급 명품 비색청자를 만들기 위해 운영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인들께서 극찬했던 전성기 고려 청자의 모든 것을 갖춘 강진 사당리에서 확인되는 초벌칸을 갖춘 완벽한 가마와 초벌 전용의 만두형 가마, 청자 선별장, 그리고 고려만의 천하제일 비색청자는 당시에 세계에서 유이(唯二)하게 청자를 만들었던 중국과 고려의 보편적 요소와 함께 고려만의 독창성과 진정성, 완결성 등을 보여주고 있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문화자원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비색청자에 담긴 수수께끼를 밝혀 줄 사당리 일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이의 비밀을 하나씩 밣히고 세계유산을 추진하는 토대가 더욱 단단하고 높게 쌓였으면 한다. 이와 함께 효율적인 보존관리와 활용계획이 잘 갖추어져 실행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비색청자에 대해 청자 생산지인 강진 사람들은 청아한 가을 하늘 자체의 아름다움이 비색일 수 있으나 강진 바다에 비치는 가을 하늘을 비색으로 인식하고 있어 이채롭다. 다음 가을에는 강진 사당리 청자 요장뿐만 아니라 바닷가를 찾아 창공의 하늘뿐만 아니라 바다도 꼭 바라보며 비색의 깊은 멋에 빠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