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22일 총을 든 한 무리의 군인들이 있었다. 남의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더니 매산등으로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이들의 출현에 놀란 주민들이 구경삼아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주민들을 한데 모이게 하더니 담장과 고목나무 밑에 세우고 곧장 총을 난사했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27명의 양민들이 어처구니없게 죽었다.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던 어린이가 발에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이 유일하다. 왜 그랬을까. 왜 무담시 죽여야 했고, 죽어야 했을까. 이 참혹한...
편집에디터 2023.01.19 13:45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도상거리 800km를 걸은 지 31일 만에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한 달 이상 걸었을 때 제일 낯설게 다가온 것은 내 외모였다. 집에서 입고 온 옷도 한 치수 정도 커졌다. 한 달 내내 빨고 입고 빨고 입어서 보풀이 일었다. 햇볕 아래에서 걷다 보니 피부가 나도 몰라보게 새까맣게 탔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을 때면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낯선 나와 조우했다. 새까맣게 그을리고 볼이 홀쭉해졌지만 눈동자만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면 외...
<다음 회부터는 오키나와에 관한 여행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2023.01.12 14:44산양(山羊)은 주로 깎아지른 절벽에 등장한다. 바위 이끼, 진달래 등의 잎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해발 천 미터 이상의 침엽수림 지대가 서식처다. 북한 쪽에 많이 있다는 뜻인데 남한의 강원도, 경북, 충북 등지의 높은 산에도 서식한다. 자기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지만, 설령 밖으로 나갔다가도 정확하게 제 위치로 돌아온다. 교감의 감각이 발달해있기 때문이다. 벼랑 위에 있는 적을 인지하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감각이 계곡의 물을 통해 반대편 산꼭대기에 이른다. 땅과 바다 특히 물에 대한 감각이 최고의 경지에 있다고나 ...
2023.01.12 14:27얼마 전 절찬리에 방영된 JTBC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탐욕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재벌총수 일가의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잘못된 욕망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환호했다. 드라마 안에는 돈이 권력이고 이 권력을 얻기 위해 각종 권모술수가 횡행했으며,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애마저도 돈과 권력 앞에서는 자그마한 감정 따위로 치부된다. 모든 관계에는 진심보다는 탐욕에 사로잡힌 정략만이 꿈틀대고 있다. 우리는 예고된 결말을 알고도 이 드라마를 보...
편집에디터2023.01.12 10:48지역학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때부터,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걸 부인하는 것은 식민지 조국 조선을 배반하는 것이었고, 더럽고 냄새나는 조국 중국을 배반하는 것이었고, 희망 없는 조국 베트남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기회와 풍요의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내가 뱀과 같은 유태인이라는 것을, 내가 무식하고 가난한 히스패닉이라는 것을, 내가 거리에서 부랑아로 자라난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다.(고종석, ?전라도 생각?, ??서얼단상??, 개마고원, 2002) 지역에 대한 주체성의...
편집에디터 2023.01.08 17:17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22년 12월 13일 기준 783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유럽에 임시 난민으로 등록되었다. 2022년 10월 18일 기준 국경을 접하는 국가로 폴란드는 임시 등록 난민이 1,449,214명으로 가장 많고, 헝가리는 30,000명으로 가장 적다. 또한 비 국경 국가로는 2022년 10월 17일 기준 독일이 1,008,935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448,807명으로 체코이다. 우크라이나인의 피란 난민 루트는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많이...
편집에디터 2023.01.08 14:15여수 시내에서 만성리 쪽으로 향하다 보면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분위기 음산한 터널을 지나게 된다. ‘마래터널’이라 부르는 이곳은 한때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다. 여순사건을 진압하던 군경에 의해 끌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을 지나 무참히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무장봉기의 주역들이 산속으로 스며들자 화풀이 차원에서 좌익 또는 부역자로 분류된 시민들을 바다가 보이는 용골로 끌고 와 죽여 저 어두운 골로 던져지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렀다. ...
편집에디터 2023.01.05 13:12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고려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피란 고려인은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는 임시 난민 위치로 인도적·정책적 지원을 받지만,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 입국하는 고려인은 난민의 위치에 속하지도 못하고 이주자에 속한다. 동시에 고려인은 재외동포의 위치를 가졌지만 기본권 보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 정부로부터 사회·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한국사회가 사각지대에 위치한 피란 고...
편집에디터 2023.01.01 14:42온정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겨울에 더욱 빛나는 마을이 있다. 우리에게 가진 자의 도리를 일깨우는 표상이 된 곳이다. 옛집 운조루(雲鳥樓)가 있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마을이다. 운조루의 안채를 다 뜯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연말연시에 꼭 가봐야 할 곳이다. “그동안 조금씩 기운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뒀다가는 붕괴 위험까지 있다고 해서, 해체하고 다시 짓고 있습니다. 기존의 건축재료도 최대한 다시 써서, 옛 모습을 살리기로 했어요. 복원 공사는 7∼8월까지 끝낸다고 합니다.” 곽영숙 씨의 말이다...
2022.12.29 16:01스페인 산타아고로 가는 프랑스 첫 순례길 첫 시작점은 생장피드포르(Sanit-Jean-Pied-de-port)이다. 파리에서 5시간 정도 테제베를 타고 바욘에 도착해서 또 완행열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피레네 산맥 아래 조그마한 마을이다. 불어를 못하는 내게 시골 한적한 역사 자동발매기는 승차권 발권용이 아니었다. 그저 낯선 기계일 뿐이었다. 해가 질 무렵 겨우 생장에 도착해서 낯선 이들과 한 방에 짐을 풀었을 때도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 여권을 만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
편집에디터 2022.12.29 15:53나는 큰 소리로 “엄매!” 하고 소리치면서 이 세상으로 왔다. 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만, 생전의 생모께서 늘 해주신 얘기다. 1897년생 아버지 예순여섯에 얻은 첫아들, 내 탄생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셨을까?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았냐 했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땅뙈기를 받는 조건으로 품은 아들을 핏덩이로 아버지께 넘긴 씨받이셨다. 역설적으로 전통시대의 악습이 베이비부머 시대의 끝자락까지 남아있던 탓에 나는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다. 강물처럼 쏟아져 내린 양수의 세례를 받고 공기 호흡을 위한 첫울...
편집에디터 2022.12.29 14:27문화분권의 시대, 지역자치의 시대, 지역학의 시대라는 화두가 제기된 지 매우 오래되었다. 그 기간이 숙성된 만큼 지역의 독창적이고 특별한 문화가 존중받거나 대우받고 있는 것일까? 기간은 오래되었다지만 그다지 숙성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지역자치도 일어나고 지역분권도 일정 부분 구축되며, 문화분권 차원의 지역학도 우후죽순 범람하는 모양새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을 하는 과정일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바꾸어 말해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제주도...
편집에디터2022.12.22 16:21시간은 유수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 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한 것 없이 시간만 또 가고 말았다고 저는 푸념하지만 어떤 이들은 가슴 뿌듯한 한 해 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술 취한 검은 개호랑이가 광대처럼 춤을 출 수 있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신나는 한 판이겠습니까. 덕분에 소외된 이들에게는 걱정만 자꾸 쌓여갑니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아니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선과 악은 항상 대립하면서 싸워왔던 것을 보면 인간의 본성과 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기분전환 겸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찬바람을...
편집에디터2022.12.22 12:4813번 국도를 타고 '땅끝' 해남으로 가는 길,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대형 무궁화 조형물도 보인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무궁화로 꽃천지를 이뤘던 곳이다. 도로변에 '덕촌 양득중의 실사구시 마을'과 함께 '지강 양한묵 생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해남 영신마을이다. 양득중과 양한묵은 의로운 길을 걸었다. 200여 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양득중은 실사구시를, 양한묵은 인내천을 주창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사회에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 덕촌 양득중(1665∼1742)은 조선 중후기에 실학을 불러들이고, 정치의 한가운데로 ...
편집에디터2022.12.15 15:28전북 부안군 적벽강에 죽막동 제사유적이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해신(海神) 관련 제사터다.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수성당(水城堂)을 수성당(水聖堂)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노천제사가 아닌 실내 제사 즉 당집 안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단서가 이것이다. 신격(神格)은 '수성할미' 혹은 '개양할미'다. 절벽 위 평탄면에는 3세기 후반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퇴적되어 있다. 고군산열도와 왕등도, 비안도 등 먼바다를 내다보기 좋은 위치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역사적 연원보...
편집에디터2022.12.15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