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모습.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오페라의 새로움을 갈망했던 베르디는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1853>에서 마녀로 오인당하는 집시 여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극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기며 자신의 주요 작품인 ‘리골레또’와 ‘라 트라비아타’의 특징적 배역의 틀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등장하는 모든 배역이 최고의 성악 테크닉을 필요로 한다. 필자는 지난 10월 6일 빛고을 시민문화관에서 지역 음악인들로 구성된 ‘강숙자오페라라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일 트로바토레>를 보며, 광주의 오페라가 성장한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또한, 품격있는 좋은 공연을 펼친 제작진과 출연진, 그리고 전석 매진으로 화답한 시민들의 모습에 다양성과 클래식 음악의 확장성을 지역 오페라계가 주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감동이었다.
‘암흑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 불리던 서양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 트로바토레>는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작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가 1836년 발표한 <엘 트로바도르>를 오페라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인 이탈리아어 ‘트로바토레’는 스페인어로 ‘트로바도르’라고도 하며 창작 예술이 능한 기사인 ‘음유시인’을 지칭한다. 음유시인은 중세 봉건 제후들의 궁정을 돌아다니며 시를 낭송하고 곡을 연주하며 살았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모습.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이 작품은 중세시대 어두운 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유럽의 권력을 움켜쥔 기독교 세력의 집시에 대한 박해, 마녀재판과 화형,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전쟁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등장하고 있다. 중세 역시 르네상스나 바로크 문학과 예술처럼 허장 허세가 표현의 중심에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과 대사들이 과장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당시 삶의 장면이 지금으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당시 14세기, 15세기는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를 죽음으로 이끈 무서운 전염병인 ‘흑사병’이 한참이던 시절이어서 작금의 시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과학적 형태의 마녀재판과 화형, 이민족에 대한 억압이 용인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시들은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유랑민으로 어느 민족보다도 천대받으며 늘 생존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 더군다나 힘없는 집시 여인이 죄 없는 자신들을 박해한 스페인의 권력자에게 멸문지화를 안겨준 통렬한 복수극 이야기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바라볼 <일 트로바토레>에서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모습.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결투’라는 부제를 가진 1막이 오르고 어두운 밤 베이스 역의 장교 페란도는 보초병들에게 성주인 루나 백작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릴 적 루나 백작에게는 가르시아라는 남동생이 있었고, 어린 남동생을 한 집시 노파가 유심히 들여다본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루나 백작의 아버지는 그것이 집시의 저주라 믿고 그 노파를 붙잡아다 화형에 처했고. 그런데 그날 밤 아기가 없어지고 불에 탄 아기의 백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궁중에서 왕비의 비서인 귀족 아가씨 레오노라가 궁전 발코니에서 연인 만리코를 기다리며 그를 사랑하게 된 경위를 시녀 이네스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그녀를 흠모하는 루나 백작이 나타나고 레오노라는 만리코라고 생각하고 그의 품에 안기지만, 루나 백작인 것을 알고 놀란다. 뒤늦게 온 만리코는 이 광경을 보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루나 백작과 결투를 벌인다.
‘집시 여인’이라는 부제와 함께 2막이 오르고 집시들이 모루를 두드리며 그 유명한 ‘대장간의 합창’을 노래한다. 그때 만리코의 어머니역인 메조소프라노 아추체나가 등장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화형당하던 당시의 일을 회상한다. 그녀는 만리코에게 그때 일을 자세히 들려주고 만리코는 자신이 아추체나의 자식이 맞나 의심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쟁터에서 백작을 차마 죽이지 못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때 만리코에게 만리코가 전투에서 죽은 줄 아는 레오노라가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보고를 받는다. 만리코는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하고 수녀원으로 달려가 루나 백작과 결투를 해 레오노라를 구해낸다.
3막 ‘집시의 아들’에서 루나 백작 진영의 병사들이 다음 날 전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자리에 페란도가 적의 첩자로 보이는 집시 여인 아추체나를 잡아서 데려온다. 그리고 그녀가 옛날 자기 동생을 불 속에 던진 집시라는 걸 알고 감옥에 가둔다. 한편 결혼식을 앞둔 만리코와 레오노라는 사랑의 기쁨에 취해있는 이때 어머니가 적진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만리코는 테너역에서 가장 부르기 어렵다는 ‘타오르는 저 불길을 보라’를 노래하며 어머니를 구하러 달려간다.
4막 ‘처형’에서는 어머니 아주체나를 구하러 달려온 만리코는 포로가 되어 그녀가 있는 감옥에 같이 갇히게 된다. 사랑하는 만리코를 살리기 위해 레오노라는 루나 백작에게 거짓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는 독약을 마신 채 만리코를 도망시키려고 감옥으로 간다. 하지만 만리코는 레오노라가 자신을 배신했다며 저주를 퍼붓고 이러는 사이 그녀의 몸에는 독이 퍼지고 만리코에게 진실을 고백한 다음 쓰러져 죽고 만다. 레오노라에게 속은 것을 눈치챈 루나 백작은 곧바로 만리코를 처형하고 만리코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아추체나는 루나에게 ‘만리코가 너의 동생’이라고 이야기한다. 루나 백작은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아 무너져 내리고 아추체나는 “어머니, 드디어 복수가 이루어졌군!”이라고 외치며 처절한 복수극은 막을 내린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모습.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일 트로바토레>를 비롯한 베르디의 3대 오페라, 그리고 그를 이어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로 칭송받는 푸치니의 오페라에 드러나는 같은 공식 중 하나는 여주인공의 죽음이다. 이는 당시 오페라를 후원하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비극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오페라를 제작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예술인이 남성이라는 것 역시 이 낭만적인 예술이 가지는 시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제작, 작곡, 연출, 지휘의 전 영역에 여성이 진출해 여성의 섬세하고 색다른 시선의 창작 작품이 만들어지고 비극의 주인공이 역전되어 남성이 비련의 역으로 창작되는 오페라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시대와 함께 하는 예술의 변화는 항상 진보적인 듯하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모습.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무엇보다 오페라는 우리에게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여러 종류의 사랑과 정의를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는 찬란한 목소리로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관객에게 혼신을 다해 고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우리가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대신 외쳐주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답답한 마음 가득하다면, 지독한 예술 향 내음을 만나길 원한다면 당장 티켓을 구매해 오페라가 올려지는 공연장으로 달려가라! 이 가을 여러분이 만날 수 있는 ‘오페라의 행복한 중독’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철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광주 빛고을문화관에서 선보인 강숙자오페라라인의 ‘일 트로바토레’ 포스터 |
◇추천 공연 : (사)강숙자오페라라인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추천 음반 : 도이치 그라마폰 198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공연 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