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 고려혁명군사협의회 무장해제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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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전남일보]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 고려혁명군사협의회 무장해제 거부
<중> 자유시 참변의 과정 및 결과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에 대해 불복종 가해자, 반혁명에 대한 범죄자로 선언
1921년 6월 28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공격으로 6월 29일 모두 무장 해제
  • 입력 : 2023. 09.21(목) 12:36
1922년 1월 21일-2월 2일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사진 출처=홍범도 장군 영상 스틸 컷
1.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의 무장해제 거부

카란다리쉬빌리가 아무르 지역에 도착했을 때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의 절반은 스보보드니에 위치하고 있었고 3개 대대(1,500명)를 포함한 나머지 절반은 스보보드니에서 75마일 떨어진 마자노보 마을에 있었다. 고려혁명군사협의회는 블라고베셴스크에 있던 사할린 부대장 그리고리예프와 지휘관 김 이노켄티를 체포한 후 그들 부대를 자체적으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 종속시키고 스보보드니 시로 완전히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따라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정치 및 군사 작전 관계에서 극동공화국 제2군 사령관에게 계속 복종한다. 둘째, 한인 파르티잔 대회에서 선출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와 극동 정부의 승인을 받은 고려군사협의회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표명한다. 셋째,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와 극동 정부의 고려군사협의회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교육적 리더십을 인정한다. 넷째, 이제부터는 아무르 지역에 머물면서 이르쿠츠크에 가지 말고 자기 일에 간섭하는 고려혁명군사협의회의 영웅들의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1921년 6월 9일 사할린 파르티잔 참모장인 박일리야는 이 결정의 내용을 카란다리쉬빌리에게 직접 전신으로 전달했으며, 여기에 파르티잔들은 그리고리예프와 김 이노켄티의 체포에 분노했고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요구 사항이 충족되지 않으면 “파르티잔들은 스보보드니 시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국 고려혁명군사협의회는 카란다리쉬빌리의 승인을 받아 부대가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지휘관 전체가 불법화되고 처벌될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질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고 명령한다. 사무국에서는 전체 지휘관에게 출발하여 내일 10시에 스보보드니에 도착하도록 명령하였다.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부대 사령관을 스보보드니로 소환하여 불복종 가해자로 선언하고 처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일부 한인 파르티잔 지휘관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하기가 어려울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한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자노보의 모든 파르티잔에게 발표되었다. 그리고 6월 10일 아침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철수하여 블라고베셴스크 방향의 철도를 향해 이동했다. 그 후 그리고리예프 및 김 이노켄티는 체포에서 풀려났지만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마침내 통제력을 잃었다. 카란다리쉬빌리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은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에 대해 개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행동이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범죄”라는 인식을 강요했다.

그 후 카란다리쉬빌리의 본부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명령에 따라 사할린 부대를 포위하고 무장 해제하기 위해 모든 군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6월 13일 보취카레보에 있는 카란다리쉬빌리가 지휘하는 기병연대에게 진군 명령이 내려졌고, 스보보드니에 주둔한 제12여단의 러시아 부대 1개 대대가 크라스노야로보를 향해 파견됐다.

한편,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니콜스크로 향하는 도로의 산길에 도달하여 산악 지역을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고 오른쪽 측면에서 블라고베셴스크 방향으로 카란다리쉬빌리 기병 연대의 압박을 받아 다시 크라스노야로보로 향했다. 6월 15일 그들은 스보보드니에 도착하여 도시에서 3~4마일 떨어진 수라제프카(지금은 자유시의 일부) 마을에 정착했다. 협상이 재개되었다. 6월 21일 그리고리예프는 카란다리쉬빌리에게 부대 사령관들의 단체 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은 모든 지휘관이 약지를 잘라 피로 서명한 것이었다. 편지에는 한인 파르티잔 전체를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공동 사업을 방해하고 파르티잔들이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최고려와 김하석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들(지휘관)은 진정한 혁명가처럼 계속 일할 수 없고 자살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6월 26일 비밀 명령 25호가 서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총 600명을 보유한 제3대대(구 이만 파르티잔 부대)가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에 배당되었다. 스보보드니 시에 주둔하고 있는 스보보드넨스키 한인 보병 연대를 보충하기 위해 제3대대 대표단은 사할린 부대 구성 그대로 대대에 남을 것을 요구했다. 상황을 논의한 후 카란다리쉬빌리는 “이제 사할린 분리대를 무장해제하고 범죄 행위에 대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카란다리쉬빌리와 고려혁명군사협의회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한인 부대를 지휘하는 카란다리쉬빌리는 모든 곳에서 정복자처럼 행동했고 그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했다. 그는 극좌 무정부주의자로서 아주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고 ‘극동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인물이었다. 그는 슈먀추키와 한국 국내에서 조선혁명을 계획했었다.



2. 자유시 참변의 진행 상황과 결과

1921년 6월 28일 밤 사할린 한인 파르티잔 부대가 스보보드니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조직 개편 명령 준수를 거부했으며 카란다리쉬빌리의 본부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6월 28일 카란다리쉬빌리는 제29보병연대 사령관에게 불복종자들을 무장 해제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연대의 대표와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장 그리고리예프가 이끄는 쌍방 간의 예비 협상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다. 제29보병연대의 극동공화국 제2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무력으로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를 무장 해제하기 시작했다. 제29연대의 공격이 시작될 때 카란다리쉬빌리는 장갑차에서 저항하는 한인 공격자에게 소총과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한인들은 이에 대응했다. 1,000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수라제프카 마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보병 부대의 일부인 항상 사할린 부대의 후방에 있던 300명의 기병이 강 건너 퇴각을 막았다. 인민혁명군 29연대 출신 270명과 장갑차 2대가 제야 강으로 향했다. 그 결과 완고한 저항 끝에 6월 28일 저녁까지 부대 한인들은 모두 무장해제 되었다. 다음날인 6월 29일 전투의 결과가 분명해졌다.

러시아 국가 사회정치사 문서 보관소의 자료에는 충돌 결과로 부대 총 1,026명 중 830명이 항복했고, 나머지는 [-] 일부가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도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국 자료에는 “우리 쪽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인 부대 쪽에서는 36명이 사망했고, 제야 강을 건너 도주하던 중 약 60명은 익사, 실종자는 약 60명, 무장해제는 860명이었다”고 보고됐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류헤르(В. К. Блюхер)에 따르면 아무르 학살의 결과로 사망자, 익사자, 실종자가 400명이 되었으며 900명이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가’로 분류되고 전쟁 포로로 러시아 부대에 넘겨졌다고 했다. 따라서 한인 사망자, 익사자, 실종자는 약 156명에서 400명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실종자들 중에는 도망치고 탈영한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박일리야는 70명의 전사와 함께 만주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면, 아무르 학살은 조선혁명운동에서 그동안 여러 한인 파르티잔 간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몰고 가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코민테른 극동사무국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가 한인 파르티잔 부대의 통합군 지휘관 형성 문제에서 불일치와 비조율적인 행동, 슈마츠키의 모험적인 계획으로 한인 파르티잔 부대의 자율성 및 다양성을 무시한 일방적인 강압적인 통합으로 발생한 것이 아무르 학살의 주된 원인으로 비극적인 슬픈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무르 학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응집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3.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 파르티잔 부대

자유시 참변 후 무장해제된 사람 중에서 죄질이 무겁다고 인정되는 자들 500여명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중에서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군단에 인계되었다. 그들은 이후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Ушумун) 벌목장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강제노동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밖에 72명은 중대범죄자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았다. 홍범도는 재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결국 자유시 참변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지 3명에 불과했다.

한인 부대의 편성, 배치, 이동, 작전 임무와 관련된 모든 근본문제들은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의 동의를 얻어 해결되었다. 그 후 1921년 7월 하반기에 무장해제 된 부대를 제외하고 모든 한인 부대는 아무르 지역에 남아 있었고 이후 극동의 다양한 파르티잔 부대로 합쳐져 2,500명에 달했다.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어 오하묵이 지휘하는 별도 고려소총여단에 배치되기도 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이 인용한 보고서에서는 “이들 2,500명의 가장 건강한 파르티잔을 군사 및 정치 훈련을 위한 학교를 대표하는 환경에 배치하면 봄까지 정치 교육을 받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군사 강사로 구성된 대규모 간부도 확보할 수 있다. 소련 러시아와 일본 간의 외교 관계와 동방의 일반적인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든지 개별적으로 이 대량의 노동자들을 한국 내부와 첫 번째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동일한 공격 지점으로 보낼 수 있다. 무기와 장비를 얻으려면 가장 편리한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이르쿠츠크는 이에 가장 적합한 도시이며 군인 및 정치 인력을 동원하는 데에도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르쿠츠크에 주둔한 한인 부대를 일본 제국주의의 배후인 한국에 대한 직접 공격을 준비시키려는 슈마츠키의 모험주의적 계획을 구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에 머무는 동안(1921년 7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별도 한인 소총 여단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작업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에 따라 수행되었다. 그러나 여단의 물질적 지원은 치명적이었다. 700명만이 겨울옷을 받았다. 1,500명의 적군 병사들이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식량 상황은 심각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베리아 서리가 시작되면서 영양실조와 추위로 극도로 지쳐 이질과 괴혈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단 인원의 60%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으로 별도 한인 소총 여단이 급여가 철회하고 사실상 여단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1922년 4월 해산된 한인 적군 700명이 이르쿠츠크에서 연해주에 도착했다. 1922년 6월 한인 적군의 또 다른 부대가 울칸 금광으로 이동했다. 1923년 한인 소총 여단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