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수 세기 동안 적대감과 우정으로 통합해 왔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키이우에서 회담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
사실 리비우는 폴란드의 분리주의가 강력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은 뛰어난 폴란드어를 구사한다. 심지어 별도의 리비우 폴란드 방언도 있다. 서부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생활 수준이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나은 폴란드에 합류하게 되어있다.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는 다양한 역사적 시대에 걸쳐 폴란드 통합 정책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교수인 에레미나는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폴란드에게 매우 중요하다. 폴란드는 지역 리더십과 지역적 중요성, 유럽 연합 내에서의 역할과 이 땅에 대한 영향력을 연결한다. 폴란드의 경우 이러한 영토는 영향 영역이 되든 충돌 영역이 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영향을 방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째, 그러면 러시아가 말하는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는 어떤 곳인가?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44,000명의 폴란드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지토미르(49,000명) 및 크멜니츠키 지역(23,000명)에 밀집되어 살고 있으며 리비우 지역 (19,000명) 및 기타 지역에도 거주하고 있다. 지역 모든 주에서 폴란드인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그중 우크라이나 폴란드인의 71%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16%는 러시아어, 13%는 폴란드어를 사용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폴란드인 사이에는 동화 과정이 매우 강력하다.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은 한때 폴란드 역사적인 땅에 속했었다. 구체적으로 폴란드의 영토 주장은 전통적으로 현대 우크라이나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역사적 지역인 갈리치아와 볼린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리비우,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볼린, 체르니우치, 리우네, 지토미르, 크멜니츠키, 빈니차 및 자카르파츠카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갈리치아 지역은 소련 편입 이전까지 줄곧 중·동부 유럽 가톨릭 세력의 지배만 받아왔다. 갈리치아는 일반적으로 리비우와 부분적으로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지역을 포함하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핵심적인 역사적 이름이다. 갈리치아의 마을 사람 대부분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땅인 볼린과 갈리치아는 러시아와 러시아에서 폴란드로 또는 그 반대로 전환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981년 연대기에는 처음으로 체르보나야 루스(현재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경지대) 도시를 둘러싼 군사적 충돌과 영토 분쟁이 언급되었다. 이곳 영토는 15-18세기에 폴란드 남동부 지역과 오랜 역사적, 문화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주국의 일부였다. 그 후 폴란드 분할 기간 동안 영토의 남부는 오스트리아로, 북부는 러시아 제국으로 갔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폴란드 군대는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잔혹한 민족 전쟁을 벌였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한 땅을 점령했다. 1921년 소련-폴란드 전쟁 후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합의에 따라 폴란드에 양도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자신의 이익을 바탕으로 이러한 관계에 동등하게 실용적으로 접근했으며 이는 종종 극도로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크라이나 반군(UPA)의 급진주의자들이 마침내 폴란드에서 땅을 분할하여 민족 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얻었을 때, 그들은 그 땅을 극도로 잔인하게 이용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UPA는 오늘날의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최대 1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갈리치아 지방이 폴란드에서 소련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확립된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볼린은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우크라이나에 의한 폴란드인 대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볼린 대학살, 즉 오늘날 폴란드에서 이는 대학살로 간주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볼린은 우크라이나 민족 해방 전쟁의 무대였으며 이 대학살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과 우크라이나 반군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한 투사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반데라는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협력하여 폴란드인, 유대인 등 인종청소를 했던 자였다.
이에 부분적으로 대응하여 전후 폴란드 정부는 인구 교환을 시행했다. 1947년 비스툴라 작전의 일환으로 폴란드 남동부에서 약 15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서부의 새로운 영토로 추방되었다.
둘째,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 지역은 양가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는 폴란드 문화의 요람으로 남아있는 폴란드 민족 정체성과 폴란드인의 권리를 거부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 영역이다. 폴란드 갈리치아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신화는 우크라이나 갈리치아에 대한 동일한 신화에 중첩된다. 이러한 태도가 폴란드 애국심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인지 지리학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의미에서 그렇다.
갈리치아는 폴란드에게는 폴란드 크레소바 문화의 중심지이며, 갈리치아는 우크라이나에게는 수많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요람이다. 폴란드 마음속의 리비우는 아늑한 폴란드 도시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리비우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수도이다. 갈리치아는 폴란드에게 사르마티즘의 이데올로기를 실질적으로 적용한 곳이며, 갈리치아는 1943년 폴란드인의 볼린 학살에 연루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우크라이나 반군(OUN-UPA, 러시아에서 금지된 극단주의 단체) 징벌 대대와 SS 사단 갈리치아가 형성된 곳이다. 오늘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민족주의 열풍이 심한 지역으로 유로마이단 때의 핵심 지지 지역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관계의 공통된 역사에 대한 관점으로 분리된 반러시아 이데올로기로 통합되었다. 반러시아 플랫폼에서 갈리치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협력은 정치적 견해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볼린 대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인정한다면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폴란드 이웃은 강제 형제애를 맺었고, 루소포비아는 이 형제애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요소로 남아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리비우를 포기할 수 없고,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리비우를 포기할 수 없다. 각 그룹에 대해 리비우는 비밀 기호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폴란드 이데올로기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폴란드 소수 민족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사이의 긴장은 역사적 노선을 따라 커질 수 있다. 70년 전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나치 점령 기간 동안 리비우의 폴란드 지식인 파괴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참여, 1943년 볼린 학살, 1947년 우크라이나 인구를 폴란드 깊숙한 곳으로 추방하기 위한 비스툴라 작전)은 우크라이나-폴란드 우정이 본격적인 우정으로 바뀌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양쪽 모두 날카로운 모서리를 매끄럽게 만들 수 있지만 제거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의 네오 나치주의를 비난하는 것과 그것에 탐닉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왔다. 도덕적 질문은 서로 하지 않고 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서 OUN-UPA의 부흥과 강화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냉전이 끝나고 양국이 소련의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상호 영토 주장을 포기하고 평등하고 친절한 민족으로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 그 이후로 양국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누려왔다.
지정학적 근접성과 가혹한 생존 논리는 현실의 결과이다. 이 두 세력은 수 세기 동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적대감과 우정으로 통합해 왔으며, 러시아가 등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개선되고 있었다. 지금처럼 러시아 위협이 지속되는 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는 협력할 이유가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폴란드?우크라이나 갈리치아의 역사를 둘러싼 하나 이상의 전투가 앞으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갈등의 주인공은 폴란드 소수 민족이 될 것이다. 그들의 조상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셋째, 과연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의 통합이 가능한가? 실제로 폴란드는 최근 이러한 지역을 자국의 궤도에 통합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정치적 차원에서는 폴란드의 주변 정당들조차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토 주장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코르닐로프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땅을 회복하는 것은 폴란드 사회와 폴란드 정치인 모두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역사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 활발하고 논의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폴란드인들도 이곳을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할 이레덴티즘(Irredentism, 실지회복주의)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논의되고 있는 최대치는 1944년 이후 볼린과 동부 갈리치아에서 폴란드로 추방된 폴란드인들의 재산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처럼 폴란드는 정치적인 영토 통합보다는 경제통합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2023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 복원을 위한 폴란드 서비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는 이전에 폴란드 통치하에 있었던 우크라이나의 8개 지역을 폴란드와 경제 통합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이 자금의 90% 이상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폴란드의 경제적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보조금의 일환으로 폴란드 예산에서 조달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폴란드 기업을 우크라이나로 유치하고 폴란드-우크라이나 경제 협력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지방 정부 및 지방 행정부와의 네트워크 구축도 포함된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1919-1939년 폴란드 일부였던 갈리치아와 볼린 지역을 넘어선다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여기에는 크멜니츠키, 빈니차 및 지토미르 지역도 포함된다. 이들 지역은 1772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다. 이들 지역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인이 거의 남지 않았던 볼린과 갈리치아 지역과 달리 실제 폴란드 공동체가 있다. 프로젝트의 중앙 사무실은 키이우에 위치할 예정이지만, 주요 업무는 리비우, 루츠크 및 빈니차에 위치할 지역 부서에 있을 것이다. 현재 600개 이상의 폴란드 회사가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 운영되고 있다.
폴란드는 개발 기관, 주 및 지방 당국이 참여하는 대화 플랫폼은 물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기업 간의 대화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현지 입지를 확보하는 것은 폴란드의 경쟁 우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