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시 홍범도 장군 묘지 앞에 선 필자.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시 홍범도 거리에는 홍범도가 러시아 극동과 중국동북부 파르티잔 부대의 전설적인 지휘관으로 한국의 유명 애국 민족 영웅이며 1937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왔다고 쓰여 있다. 사진=필자 제공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문화의 집에서 필자(김 엘레나 고려인협회 회장, 강제이주 1세대 할아버지, 그리고 고려인 청소년들과 함께) |
1921년 12월 이르쿠츠크에서 한인 파르티잔 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위원장은 최진동, 위원은 한인 파르티잔 부대 총사령관인 홍범도, 총사령부 채영과 이병채 참모장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한국, 만주,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파르티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들이었다. 김동한에게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했다. 그는 ‘아무르 지역에서 한인 파르티잔 처형에 대해’, 그리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강력한 사업 관계를 구축하여 일반 ‘조선혁명투쟁계획’을 확립해야 했다. 1922년 3월 초에야 김동한은 ‘아무르 사건에 관한 각서’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한인 파르티잔들을 대표하여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 각서를 제안하며, 우리 전사들이 전투에서 재현할 수 있는 아무르 전선으로 우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르쿠츠크에 우리의 쓸모없는 체류는 우리의 군사력을 완전히 마비시킬 것이라고 했다.
1922년 2월 극동 인민회의 한국대표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인민위원회 동부 부서에 아무르 학살 조직자들의 행위를 규탄할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소련 정부에 날씨가 따뜻해질 때까지 이르쿠츠크에 주둔한 한인 여단을 유급으로 남겨두고 파르티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전투 준비를 갖추고 연해주로 진격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한인 여단 전체를 연해주로 이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대표단은 영구적인 인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당 여단을 장기간 러시아 적군에 배정할 것을 제안했다.
아무르 학살은 조선혁명가들로부터도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2년 3월 말 한국노동조합의 전러시아중앙위원회는 아무르 강의 한인 파르티잔 탄압 조직자들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회가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인 파르티잔 전투원들은 “우리 형제들이 너무나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사할린 부대에 대한 보복에 대해 한인들은 분개하고 있다. 이 사건이 시급히 규명하고 가해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고 썼다.
2. 자유시 참변 당시와 이후의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직접 쓴 자필이력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에서 출생한 시기부터 1928년까지만 쓰여 있다. 그리고 다른 프로필에서 그는 조선 국적으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한인 파르티잔 부대 지휘활동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그가 1922년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하여 (레닌으로부터) 모스크바에서 무기와 금화 100루블의 현금 보상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군 등록 범주에는 연령 제한으로 인해 등록이 취소되었다고 되어 있다.
홍범도 장군은 자필이력서에서 “1921년 1월, 군수품이 부족하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수백 배나 우월한 왜군들의 추격을 받는 나는 만주에서 700명의 전투 부대원들과 소련 영토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에는 전투 부대원 중 일부가 떠나 380명이 남았다. 나는 나머지 220명의 파르티잔과 함께 제2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스보보드니로 갔다. 자유시에서 나는 카란다리쉬빌리 부대에 합류했고 이어 5월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군 한인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썼다.
이어 그는 “1921년 11월에 나는 한인 부대 대표로 자유시에서 발생한 유혈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 나는 1922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나는 칼리닌스키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했고 1927년에 그곳의 당에 합류했으며, 1928년부터 현재까지 나는 한카이스키 지역의 ‘한카의 별’ 코뮨(공동체) 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홍범도 장군은 1923년 이후 1937년까지 집단농장에 종사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1927년으로 되어 있다. 홍범도 장군은 만 60세가 된 1929년부터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연금생활로 들어간 이후 홍범도 장군은 원동 각지의 도시와 농촌 고려인구락부, 군부대, 피오네르(소년단) 부대와 야영에 빈번하게 초청되어 인민대중과 청소년들에게 애국주의와 국제주의적 교양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금까지의 러시아 측 기록 자료를 보면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어떠한 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의 무장해제에 역할을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홍범도 장군은 ‘아무르 사건에 관한 각서’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를 레닌에게 하는 등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3.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 홍범도 장군의 삶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시르다리아 강 건너편의 사나리크 셀소비에트(카잘린스크 구역)로 이주하였다. 이후 1938년에 홍범도 장군은 크즐오르다 시로 이사하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의 생활을 여유롭지 않았다. 그는 6월 18일부터 3개월간 90루블을 받고 병원의 경비로 일하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의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고려극장 관계자들이 홍범도 장군에게 월 50루블을 받는 수위장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 사망 때까지 약 6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생활은 다른 고려인 동포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소련 시기 동안 신뢰할 수 없는 적성민족으로 낙인찍혀 숨죽여 살아갔는데, 홍범도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리정희의 작품 ‘장군 홍범도의 죽음’에는 1943년 가을, 홍범도 장군은 몸이 편치 않고 자주 앓게 되자 크즐오르다에 있는 친구들을 집으로 청하고 자기가 기르던 돼지를 잡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친구들과 술상을 나누면서 “어쩐지 몸이 좋지 않으니 이게 마지막을[일] 줄도 모르니까 한번 친구들에게 대접을 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며칠 후 홍범도 장군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홍범도 장군이 자기들과 하직 인사를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사망하였다.
4. 윤석열 정부의 자유주의 이념논쟁의 근원
그동안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의 통제 하에 있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는 더 이상 미국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단극이라는 미국의 국제질서에 숨 막히게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좌파와 우파의 고전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대중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다극 세계 질서를 바라고 있다. 그런다고 미국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미국을 싫어하면 한국에서는 큰 일 날 수도 있다. 바로 서구 자유주의의 불가침성, 미국의 단극성에 도전은 용납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중국과 러시아는 무시해도 될 정도다. 지난 소련 붕괴 이후 세상은 미국의 단극 질서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 미중 경쟁으로 인한 지속적인 글로벌 정치적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팬데믹,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사건이 된 글로벌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이제 미국은 홀로 이 세계를 책임질 수 없다. 한국은 신냉전 체제 구축에 앞장서기보다는 새로운 경험, 다극주의에서 세계 질서를 만들어야 가야 한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념투쟁도 자세히 보면 윤석열 정부의 자유주의라는 미명아래 미국 단극 질서에 따라가는 세계 패권정책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 이력은 여기에 이용되고 있는 듯하다. 과연 이것이 주변 강대국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로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선이자 안전한 피난처 국가인가!
국가 없는 디아스포라였던 홍범도 장군, 참으로 민족독립 때문에 비극적이고 처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죄 없는 그가 통일되지도 못한 분단 조국에서 다시 이념문제로 싸움질하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보면서 원통해서 울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제 우리는 철이 지난 유사(類似) 자유주의 이념이 아닌 탈이념화된 세계, 그리고 세계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방주의를 억제하며 다양한 가치, 규범, 절차를 준수하고 조율하는 다자주의를 바라고 자유와 민주,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염원하고 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