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이전의 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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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이전의 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다”
428. 을사(乙巳)년 뱀의 뜻
  • 입력 : 2025. 01.02(목) 18:19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뱀의 형상을 한 불빛이 희망을 잔뜩 껴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신명나게 달린다. 뉴시스
육십갑자로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음력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양력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설날이라는 기점이 동짓날, 양력 설날, 음력 설날, 입춘, 심지어 삼월삼짇날까지 변화해 왔음을 상기한다. 동짓날이 고대의 설날이었다는 점은 팥죽 한 그릇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관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마한의 설날이 씨뿌리는 오월 며칟날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설날이 4월의 송끄란(물 축제하는 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마무리인지,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양한 견해를 살필 필요가 있다. 기회를 만들어 따로 소개한다. 2025년 을사년을 푸른 뱀의 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마찬가지다. 육십갑자로 대표되는 시간의 개념은 하늘의 수 천간(天干) 10개와 땅의 수 지지(地支) 12개를 씨줄 날줄로 엮어 만든 구조다. 천간의 을(乙)이 푸른색에 해당하고 지지(地支)의 사(巳)가 뱀이니 을사년(乙巳年)을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문제는 을사년과 ‘을씨년스럽다’라는 형용의 기원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강제 조약 체결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국권까지 잃게 되는 시발이 되었으니 그 울분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만 검토가 필요하다. 조항범은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에 대하여’(한국어학, 2014)라는 논문에서 이 형용이 을사늑약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사전 또한 그리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을사년스럽다’라고 했다가 1920년판 조선어사전에서 ‘을시년스럽다’로, 1957년 큰사전부터 ‘을씨년스럽다’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남잡지’(1855), ‘한영자전’(1897) 등의 연대를 보면 후대에 재구성된 의미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을사년이 항상 을씨년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결정론을 수긍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4년 갑진년에서 2025년 을사년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재난과 사회 분위기를 정당화시켜 주는 해석이기도 하니 더욱 그렇다. 나는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을 ‘으실으실’이나 ‘으슬으슬’ 등의 형용에서 온 말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적 사건과 ‘가년스럽다’ 등의 형용을 덧붙여 암울한 당대를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을사년이 을씨년스러웠던 것도 아니고 지금의 을사년이 을씨년스러울 필요도 없다.



뱀의 양면성과 벽사진경의 길항(拮抗)

뱀의 기본적 컨셉은 양면성에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그것이다. 뱀 자체를 보면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사람을 일시에 죽일 수 있는 독을 가지고 있다거나 모양 자체가 징그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자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히 상고하는 것은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것과 겨울잠을 자고 봄에 부활하는 생태이다. 허물을 벗으니 새롭게 태어나며 거듭난다는 의미로 확장되었고 겨울잠에서 깨어나니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고등종교 중 뱀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것은 힌두교의 나가(Naga)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용에 대응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인 형상은 코브라 등을 모티프 삼은 뱀이다. 힌두교 사원 석인상 후면에 장식된 여러 마리의 뱀이 나가다. 불교에서 가릉빈가로 재구성된 가루다(Garuda)와는 상극이다. 가루다는 비슈누의 화신인 나랴야나를 태우고 다니면서 용을 잡아먹으며 산다는 설정이 있다. 불교에서의 뱀은 애욕이나 유혹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풍요와 다산, 재물, 지혜 등을 상징한다. ‘불설비유경’에서는 죽음을 상징하고 ‘백유경’에서는 교만함을 상징하지만, ‘숫타니파타’ 첫 장에서는 수행자가 고행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뱀이 허물 벗는 것에 비유한다. 허물을 벗으니 재생, 영생, 치유의 상징이 된다. 불교 전체로 보면 네거티브적 요소와 포지티브적 요소가 섞여 있다. 기독교의 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세기의 뱀은 아담과 이브를 꾀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에 사탄에 비유된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지혜의 화신으로 나오기도 한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바티칸의 시스티나소성당 천장화를 보면 선악과가 열린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간 뱀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동양 신화의 시원처럼 회자되는 여와와 복희의 그림도 두 마리의 뱀이 마치 교미하듯이 엉켜있는 풍경이다. 이 형상들이 음양의 교섭으로 풀이되는 것은 고대로부터 뱀의 특성을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민간 신앙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업구렁이가 있다. 집안의 재산을 늘려준다는 속설이 있어 구렁이를 절대 해치면 안 된다고 한다. 아마도 불교 전래 이후 그 의미가 확장되었을 텐데, 카르마(Karma) 즉,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한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집안의 구렁이에 투사하였다고나 할까. 나의 존재 근원을 이 카르마를 통해서 성찰할 수 있다. ‘탯줄코드’(민속원)를 쓴 김영균은 이를 ‘탯줄’로 해석한 바 있다. 볏짚으로 꼬아서 만든 줄을 ‘새끼줄’이라고 부르는 데 착안하여 종교적, 철학적 깊이까지 파고든 것이다. 하고많은 용어 중에 왜 짚으로 꼰 줄을 ‘새끼’ 즉 ‘자식’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하여 호명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매해 연초에는 마을마다 당산제를 모시고 굿을 하는데, 반드시 아홉 가닥으로 꼰 새끼줄로 줄다리기를 한다. 여러 차례 본 지면에서 관련 내용을 소개하였기에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지만, 뱀 혹은 용이 갖는 근원적 의미만큼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을사년 뱀해를 맞아 뱀이 가지는 캐릭터적 성격, 갱생과 재생, 거듭남과 부활을 주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도인문학팁

뱀을 직조(織造)해 만든 두 가지 캐릭터, 이무기와 용

뱀의 의미를 확장한 상상의 동물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무기와 용이다. 이무기를 뿔이 없는 용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저주에 의해 용이 되지 못하고 물속에서 산다는 설정이 있다. 몇백 년 묵은 구렁이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용은 동양인들이 상상해 낸 가장 꼭짓점에 있는 동물이다. 대통령 등 권좌를 상징하기도 한다. 용은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이무기의 배, 잉어 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 발바닥 등 아홉 가지 동물의 가장 우수한 점만을 뽑아서 만들었다. 이 두 캐릭터의 근원에 뱀이라는 이미저리가 있다. 을사년 뱀의 해를 맞아 상고하고픈 대목이 이것이다. 뱀의 해라고 해서 그 성격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을씨년스러운 을사년이 아니라, 다시 생성하고 재구성하고 뒤집어엎는 역(易)의 원리를 성찰하자는 뜻이다. 성경의 뱀이든 동양 신화의 뱀이든, 아니면 한반도 마을 곳곳마다 연행하던 새끼줄의 줄다리기이든 이 내력이 바탕에 있다. 이 근본을 씨줄 날줄로 직조하여 만든 두 가지 캐릭터가 이무기와 용이고, 이는 뱀의 양면성 혹은 양가성을 드러낸다. 이무기와 용은 뱀을 모티브 삼은 벽사진경(壁邪進慶) 시스템이다. 벽사(壁邪)의 싸움이 없이는 진경(進慶)의 복락이 없다. 예수의 십자가 매달림이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탯줄 자름 없이 온전한 출생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게 속한 이전의 우주를 죽여야 광명한 천지의 우주가 열린다. 뱀이 허물을 벗는 까닭도 그렇고,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이치도 그렇다. 집안의 구렁이를 카르마 삼아 자신과 나라와 세계의 존재 근원을 살폈던 지혜가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이전의 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이 뱀해를 맞는 마땅한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