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해남 거칠마 유적, 마한 소도임을 밝힌 첫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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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해남 거칠마 유적, 마한 소도임을 밝힌 첫 사례
423.마한의 소도가 해남에 있었네
  • 입력 : 2024. 11.28(목) 16:21
해남 거칠마유적 발굴조사 현장. 마한문화연구원 제공.
해남 거칠마유적 발굴조사 현장. 마한문화연구원 제공.
고문헌으로만 접하였던 마한의 소도(蘇塗)를 실제 확인하였다. 지난 6월 1차 보고 때만 하더라도 거칠마 토성이었고 그 안에 있는 제단이 발굴되었다고 했다. 이제 토성이 아니라 마한 소도로 바꾸어야 한다.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환구(環溝) 및 기둥을 세웠던 구멍들이 마치 집터를 이룬 것처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소도의 텃자리를 찾은 최초의 사건이다. 나는 거칠마유적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국민대 변남주 교수와 함께 두 차례 현지답사를 실시하였고 자문을 하였다. 변교수와 여러 번의 토론을 거치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나는 왜 해남 거칠마 유적을 소도라고 확신하게 되었는가. 마한의 소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이동이전(魏志東夷傳) 한전(韓傳)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 책은 진수(陳壽, 233~297)에 의해 찬술되었으므로 우리나라를 기록한 매우 빠른 기록이다. 비슷한 기록이 <후한서> 동이전, <진서> 사이전, <한원> 마한전, <통전> 변방문동이전 등에도 나타나므로 우리나라 고대사 내력치고는 풍부한 편이다. 가장 먼저 인용하는 부분이 흔히 농악이나 강강술래의 시원이 된다고 하는 대목이다. “항상 5월에 종자를 심는 일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무리지어 노래하며 춤추고 술 마시면서 밤낮을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밟고 뛰기도 하는데, 손과 발이 서로 맞아 절주하는 모습이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났을 경우에도 역시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귀신을 믿어 국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그 명칭을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각국은 각각 별읍(別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명칭을 소도(蘇塗)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걸었다.” 이 대목만으로도 농경사회의 일면과 종교의례와 관련한 전통,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구조 및 설치물, 오늘날 민속놀이로 전승되는 춤과 노래의 맥락 등 방대한 정보를 헤아려볼 수 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마한에는 54개 혹은 55개의 나라가 있다. 각 나라는 천 명에서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다. 별읍에는 5월과 10월에 농경 제의가 열렸다. 5월에는 씨뿌리는 일을 마치고 모여 의례를 행했고 10월에는 추수를 끝내고 모여 의례를 행했다. 5월의 것을 파종제, 10월의 것을 추수제라고 할 수 있다. 소도는 곧 별읍(別邑)이다. 여기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 5월이니 양력 6월이다. 밭벼나 귀리 등을 파종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파종을 끝낸 사람들이 소도에 모여 앞 사람을 따르며 허리를 굽혀가며 손과 발을 맞추고 발로 땅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는 것 아닌가. 10월의 추수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지신밟기 곧 마당밟이를 연상할 수 있다. 나는 이 소도의 의례춤을 강강술래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이론을 주장해왔다. 강강술래 관련 지난 내 칼럼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이번 거칠마 유적의 점토 유구와 유적 안쪽으로 닦인 점토 길이 바로 앞 사람을 따르며 탁무와 비슷한 절주로 춤을 춘 마한사람들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 10월 6일자 본 지면에서 강강술래를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맥락에서 해석한 바 있다. 강강술래는 바다 혹은 강, 아니면 어느 신성한 넓고 큰 샘 등 물과 함께 연행되었다. 줄여서 말하면 강강술래와 마당밟이는 옛 마한의 땅 곧 지금의 남도지역에서 발원하였거나 적어도 성행한 의례이자 놀이다. 무수한 섬과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옛 마한 권역이 그 증거다.



남도인문학팁

해남 거칠마 유적이 마한 소도인 이유



해남군 북일면 용일리 1059~2번지 거칠마 유적은 마한의 소도임이 분명하다. (재)마한문화연구원에서 발굴하고 있는 거칠마 유적 구릉 전부가 크고 넓은 야산으로 유적은 네모꼴(방형)이다. 북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비탈길이고 서쪽으로는 주거군락지이며 남쪽은 고분군이고 동쪽은 넓게 트인 바다다. 고분군 쪽으로 장고봉 고분군 등 십여 개의 고분군이 운집해있다. 지상 건물지(방형단)에는 큰 도리 기둥을 세울 만한 18개의 큰 구멍이 나란히 발굴되었다. 이로 보면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처럼 2층 혹은 3층의 대형 건축물 자리로 추정된다. 참고로 요시노가리 유적은 마한시대 영산강유역 사람들이 건너가거나 전해준 유적이다. 건물지의 북쪽으로 건물에 오르는 계단으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발견되었다. 정동쪽으로는 점토로 다져서 만든 넓은 연못(점토유구)이 있다. 나는 이것을 5월제와 10월제를 지낼 때 목욕재계하는 신정(神井)으로 해석하였다. 바닥층에 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샘이 아니라 특별한 기간에만 신성한 물을 공수하여 목욕재계하였기 때문이다. 물을 오래 담아두면 썩기에 관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신정은 천군이 제사 드렸을 방형단 누각에서 정동쪽이다. 동쪽에서 뜨는 달과 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月印千江>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컨대 동쪽으로 떠오른 보름달은 해남반도 앞바다에 길게 드리우고 신정에 또 비친다. 이 달이 마한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와 천 개의 달이 되었던 셈이다. 씨앗 뿌리기를 마치고 만월의 축복을 기원하는 의례라고나 할까. 아니면 물때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서무셋날 고사일 수도 있다.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아침이라면 천 개의 해가 마한사람들이 가슴에 떠오르는 형국일 것이다. 소도에 모인 천군과 마한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잘 자라 풍성해질 수 있기를 기원하며 발로 땅을 구르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거칠마 유적 안쪽으로 둥그렇게 돌 수 있는 길이 조성된 것이 그 증거이다. 이 길은 여러 사람이 어깨를 겯고 걸을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은데, 군데군데 암반을 깎기도 하고 낮은 부분은 점토로 메꾸고 다져서 조성하였다. 방위 별로 계단들이 설치된 것도 토성이 아니라 신성 공간 소도임을 말해준다. 북쪽으로 난 계단은 경사가 매우 급해 사람이 들고나기 어렵다. 신격의 들고 남을 연출하는 공간, 예컨대 띠배를 띄우거나 신맞이 행사 등의 의례를 행했을 것이다. 서쪽은 마을 주거지 공간과 연결되고 매우 완만한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오르고 내린 통로였을 것이다. 이 모든 계단들에는 정상의 건물지보다는 좀 작은 나무 기둥들을 꼽을 수 있게 양쪽으로 구멍들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유적 둘레 전체에 6~7미터 간격으로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를 두고 해석이 난무하였으나 나는 이를 경계 표식을 위한 용도로 해석했다. 무더기 안에 점토 흔적도 발굴되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예컨대 대나무 등을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산제를 지낼 때 왼새끼를 꽈서 신성 권역을 표시하는 것과 같다. 새끼줄뿐만 아니라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방울과 북을 여기 매달았을 가능성도 있고 오방색 깃발을 달았을 수도 있다. 정상부 건물의 북동쪽으로 원형 공간을 조성하는 구멍들(수혈 건물지)이 있다. 랜드마크이기도 할 가장 큰 기둥에 방울과 북을 매달았을 텐데 그 위치가 혹시 여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누각의 기둥들이 너무 튼실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누각의 중앙에 큰 나무를 세웠을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황을 조성할 때나 큰 노동을 할 때 젊은이들의 등가죽에 밧줄을 꿰어 잡아 다니는데 모두 용맹하게 임했다고 했다. 신정과 건물지 사이의 넓은 마당이 이같은 의례와 놀이들을 연행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접신의 매개물로 사용되었던 술과 음주에 대해서는 차후 풀어 설명하겠다. 해남 거칠마 유적 즉 마한의 소도 유적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소도가 확인된 첫 번째 사건일 것이기에 기왕의 발굴 토성들은 물론 경기만에서 해남만까지 발굴될 유적들을 좀 더 면밀히 살펴야겠다. 기록으로만 접하던 소도를 해남해서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