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종가 종택. 일제강점 때 불에 탄 집을 새로 지어 고즈넉한 옛멋은 없다. |
학봉 고인후 묘. 학봉종가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
호남의병 특별전에 전시된 ‘불원복’ 태극기. 특별전은 순천 호남호국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
고재청 녹천고광순기념사업회장이 선비문화체험 참가자들에게 가문의 의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사당입니다. 불천위(不遷位) 중에서도 권위가 가장 높은 국불천위입니다. 불천위는 공신이나 덕망 높은 분에 대한 제사를 특별히 지내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가리킵니다. 사불천위, 향불천위, 국불천위 세 가지가 있어요. 불천위는 위패를 함부로 옮겨서도 안 됩니다.”
고영준 어르신의 말이다. 고영준 어르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학봉 고인후의 후손이다. 사당은 고인후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장독대는 학봉종택의 뒤안이었다. 학봉종택은 장흥고씨 의열공파 가문의 종갓집이고, 고영준 어르신은 종손이다. 의열공파는 고인후를 뿌리로 해서 430여 년을 이어왔다.
고인후(1561∼1592)는 아버지 고경명, 형 고종후와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의병 6000여 명을 이끈 고경명과 둘째아들 고인후는 금산전투에서, 장남 고종후는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했다.
한말 의병장 녹천 고광순(1848∼1907)도 고인후의 후손이다. 고광순은 가국지수(家國之讐)의 깃발을 들었다.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동시에 갚자는 말이다. 그에게 일본은 나라의 적이면서, 집안의 원수였다.
고광순은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를 든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불원복은 독립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태극기는 세로 82㎝, 가로 128㎝ 크기로, 흰색 바탕에 붉은 색실로 ‘不遠復’이 새겨져 있다.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고광순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불원복 태극기를 만들어 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장기전을 계획하고 지리산 피아골로 옮겨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았다. 12대 할아버지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나이 60살과 같았다. 학봉종가가 의병 명문가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고광순의 집도 일본경찰에 의해 불태워졌다. 대를 이어 의병활동을 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종갓집은 물론 고광순의 유품과 유물까지도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고광순 순절비가 지리산 연곡사에 세워져 있다.
불원복 태극기와 함께 한 ‘전남종가 선비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전라남도가 6월 3∼5일 세 차례 진행한 프로그램은 청렴문화 확산에 방점을 찍고 있다. 프로그램에는 전남청렴사회 민관협의회 등 전남도내 유관기관·단체 임직원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담양 녹천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에선 학봉종가의 이숙재 종부가 진행하는 전통 찻자리를 체험했다. 종부는 직접 따서 덖은 담양특산 죽로차(竹露茶)를 선보이며 다례를 알려줬다.
“죽로차는 대숲에서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바친 고급차입니다. 마을주민과 함께 죽로차 협동조합을 만들어 100% 수제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대숲에서 찻잎을 따고, 덖는 과정까지 모두 전통방식 그대로 합니다.” 이숙재 종부의 말이다.
고재청 녹천고광순기념사업회장이 들려주는 가문의 의병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종갓집에서 복제본으로 보관하고 있는 불원복 태극기도 보여줬다. 종가체험에 참여해야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학봉 할아버지 자손이 서른 분입니다. 모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셨고, 헌신했습니다. 의병 집안에서 의병 나온다고, 의병활동을 하다 순절한 분이 아홉 분입니다. 학봉종가는 마을의 큰 자랑이고, 주민들의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학봉종가가 담양 유천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슬로시티’로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속한다. 남극루 앞을 지나는 ‘창평현로’로 이름 붙은 60번 지방도를 경계로 삼지내마을과 유천마을로 나뉜다. 남극루는 월봉산에서 시작된 월봉천, 운암천, 유천 등 3개의 물줄기가 모이는 삼지내(삼지천)에 속한다.
창평에선 지금도 옛 방식대로 쌀엿과 한과를 만들고, 간장과 된장을 담근다. 종가의 장맛을 잇고 있는 기순도 명인도 유천마을에 산다. 기 명인은 ‘음식의 맛은 장에서 나온다’는 말을 새삼 실감케 한다.
유천(柳川)마을은 겉보기에 별날 건 없다. 마을 지형이 버드나무를 닮았을 뿐, 산자락에 둥지를 튼 평범한 농촌이다. 역사는 깊다. 1400년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인조가 월봉 고부천을 만나려고 세 번 찾아 ‘인조대왕 삼고초려리’라고도 불렸다. 고부천은 고인후의 둘째 아들이다.
고부천은 전남대 홍매와도 엮인다. 명나라에 특사로 간 고부천이 희종황제로부터 홍매 한 그루를 받아 유천마을에 심고, 대명매(大明梅)라 불렀다. 그의 후손인 고재천 당시 교수가 대명매의 분주를 1972년 전남대학교에 기증했다. 우리가 명품매화로 꼽는 ‘전남대 홍매화’다. 전남대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지난 봄 홍매의 후계목을 마을에 기증하고, 표지석을 세웠다.
유천마을은 고인후의 처가 동네였다. 고인후 순절 이후, 그의 아들이 외갓집에서 자랐다. 창평에 터를 잡은 첫 번째 장흥 고씨가 됐다. 학봉종택 뒤편 언덕에 고인후의 무덤이 있다.
녹천기념관과 고광순을 모신 사당 포의사(褒義祠)도 마을에 있다. ‘불원복’ 태극기를 복제본으로 보여준다. 기념관 뒤편에 세워진 조선오란 호국충혼탑도 애틋하다. 정묘호란, 임진왜란 등 5대 전란에 참가해 순절한 호남의병을 기리고 있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