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이강하 화백에 고생했다는 말 못해 천추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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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강하 화백에 고생했다는 말 못해 천추의 한”
●이정덕 오월어머니집 사무총장
시민군 이 화백, 6개 혐의받아 옥고
2008년 진상규명 없이 암투병 사망
"선생-제자 첫 만남…항쟁이후 고난"
유족 재심 노력에 지난해 '무죄선고'
  • 입력 : 2024. 05.16(목) 19:12
  •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
다시 오월이다. 44년이 지났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기리며 참배객 모두 고개를 숙인다. 유가족들의 눈물도 말랐다. 자식을 잃은 노모의 가슴은 한(限)으로 채워졌다. 주름살이 깊이 패였고, 머리도 하얗게 샜다. 가슴 속 응어리는 여전한 데 5·18묘역을 찾지 못하는 어머니들이 늙어간다. 늙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한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 오월 유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서둘러야 한다. 사진은 2004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오열하는 5·18 희생자 고 김상구씨의 어머니 나점례 여사. 매년 묘역을 찾아 아들의 묘비와 사진을 어루만졌던 나 여사는 안타깝게도 2023년 1월 타계했다. 김양배 기자
“이제 나이가 들어 깜빡깜빡하는데, 80년 5월 그이와의 일들은 모두 기억나요. 무죄 소식 못 듣고 보낸 게 그저 한스러울 뿐이지요.”

최근 광주 남구 오월어머니집에서 만난 이정덕(74) 사무총장은 엄혹했던 44년 전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5·18 시민군’ 고(故) 이강하 화백의 배우자인 이 사무총장은 당시 자신의 남편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 밤을 지새웠다. 시민군이 계엄당국에 끌려가 갖은 고문 등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혹시 그이일까’하고 한걸음에 달려가기도 했다. 이 화백과 이 사무총장 모두 꽃다운 20대였다.

꿈 많던 젊은 부부는 광주항쟁을 겪으며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미술로 만나 사랑을 싹틔우던 신혼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붉은 물감으로 얼룩졌다.

“남편은 1980년 27살 늦깎이로 조선대학교 미대에 들어갔어요. 고향 영암에서 통학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죠. 학교가 끝나면 미술학원 선생님을 해 등록금을 벌었어요. 저와는 그때 학생과 제자로 처음 만났죠. 되돌아보니 아무 걱정 없던 시절은 그때뿐이었네요.”

이 화백은 80년 5월 21일 미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한 여학생이 공수부대원에 구타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고 적혔다. 이 화백은 곧장 영암에서 시민군을 모아 항쟁에 참여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붓으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 추방하라’ 등의 현수막을 제작했다.

버스를 몰고 가던 중 송암동 등서 무장 계엄군에 광주 길목이 막히자, 강진과 해남 파출소에서 총기 탈취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이로 인한 전력으로 1986년 총포 화약류 단속법·포고령 위반 등 6개 혐의를 받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정덕 오월어머니집 사무총장. 정성현 기자
“상무대 출소 날인데 남편이 안 나오더라고요. 알고 보니 하도 때려 성한 곳이 없으니, 날짜가 미뤄졌던 거에요. 무기고 탈취 주동자라고 참 많이도 끌려갔죠. 겨우내 만난 남편은 벙어리마냥 말이 없었어요. 그저 그림만 그렸습니다. 유일하게 한 말이 ‘나는 이제 또 들어가면 죽는다’였어요.”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이 사무총장은 그해부터 가장이 돼야 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딸과 아들 그리고 이 화백의 뒷바라지를 했다. 한스러운 가족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 버텨내듯 살아갔다. 그 사이 이 화백은 5·18의 아픔을 풀어낸 작품 ‘맥(脈)’ 연작을 발표한다. 맥은 평단에서 1980년대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건강하던 이 화백은 2003년 갑작스레 직장암 판정을 받는다. 수년 간의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2008년 3월 유작 ‘무등산의 봄’을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한순간에 앓아누웠어요. 오월 후유증이라는 생각만 들었죠. 그때부터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어요. 고통스러운 건 우리 가족뿐이었습니다. 즉시 모든 걸 뒤로하고 ‘오월’ 하나만 보며 살게 됐어요”

이 사무총장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 화백의 그림이 있던 광주 남구에 모든 작품을 기증했다. 이는 2018년 이강하미술관이 세워지는 단초가 됐다. 오월어머니집 활동도 시작해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열심을 다했다.

그 덕분일까. 이 화백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5·18 주동자 등 6개 죄명’도 지난해 12월 광주고등법원 재심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벗겨졌다. 앞선 2022년에는 보훈처로부터 ‘오월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드러나야 할 오월의 진실과 과제는 산적했다. 이에 딸과 아들도 책임자 처벌과 5·18의 헌법 전문 수록 등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섰다.

딸 이선씨는 미술을 전공해 현재 이강하미술관서 ‘오월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아들 이조흠씨는 올해 ‘제44주년 5·18 전야제’ 연출감독을 맡아 무대를 준비 중이다.

이 사무총장은 반세기를 앞둔 오월이 ‘이제 더 이상 아픔이 아닌 희망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꿈 많던 사람이 모진 옥고를 겪고 참 인생이 기구해졌어요. 살아 생전 ‘당신 잘못 없다오. 고생 많았소’, 이 한말 못 해준 게 천추의 한이죠. 억울함 한번 털어내는 게 소원이라던 어머님들도 그간 많이 돌아가셨어요. 유가족들이 못다 이룬 한 이제라도 털어내길 바라요. 더 이상 슬픔보다는 기억·계승되는 오월이 되길 소망합니다.”

한편 이강하미술관은 24일부터 오는 7월 31일까지 오월특별기획 '서정적 순간, 그 이후' 전시를 개최한다.
오월 유가족들이 2019년 5월 17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헌화·분향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