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배움의 庭園·임효경>유년의 여행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전남일보]배움의 庭園·임효경>유년의 여행
임효경 완도중 교장
  • 입력 : 2024. 01.17(수) 14:38
임효경 교장
완도에 와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났네요. 그리고 방학입니다. 학교는 적막이 가득합니다. 넓은 운동장에는 청해진항 바다를 반짝반짝 비추고 남은 햇살이 심심한지 놀러 왔네요. 겨울이라 햇살도 따스함이 필요하겠죠. 따스함을 누리기엔 우리 학교 운동장이 최고이지요. 겨울이라고 물러서지 않는 파란 하늘과 학교 뒷산 서망산에 사는 딱새들의 합창도 있고, 바람과 숨바꼭질하는 구름도 볼 수 있거든요.

그 운동장을 가로질러 완도군립도서관에 얼른 들러서 책을 빌려왔어요. 학생들이 없는 방학엔 역시 책을 읽는 것이 최고입니다. 엊그제 방학식 때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를 했어요. 읽고 싶은 책 세권을 골라서 침대 맡에 놓아두고 잠자기 전 꼭 읽어보라고요. 우리 학생들 그렇게 하고 있겠죠? 독서가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시절 돌아보면. 방 윗목에 놔둔 그릇의 물도 얼어버리는 추운 겨울이 있었어요. 그 추운 겨울방학에 그래도 따뜻한 아랫목, 구운 고구마와 동치미, 그리고 책이 있어 견딜만했었지요.

완도군립도서관은 첫 방문이에요. 우리 학교랑 서망산을 10분 거리로 공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서관이에요. 조선시대 관리들의 객사 자리로 호남제일관문 청해관이라 쓰인 대문이 입구에 서 있답니다. 300여년 나이 먹은 아주 멋진 푸조나무와 200년 된 느티나무가 도서관 양옆에 우뚝 서 있어요. 또 돌이 깔린 마당 한 켠에서는 키 큰 매화나무의 간드러지게 구부러진 허리 곡선을 볼 수 있답니다. 몇 번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책을 빌려 보았네요. 조용하고 정갈한 도서관이 참 맘에 들었어요. 잘 정리된 서가를 둘러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찾아냈어요. 오정희 소설 <유년의 뜰>을 다시 읽어보려고요. 그리고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을 읽으며 앉아서 걷기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독서와 여행은 참으로 오래된 나의 습관이지요. 독서와 여행은 공통점이 있어요. 낯선 것을 접하고, 새롭고 유쾌한 세상을 발견하고, 평범하다 못해 찌질한 나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또 나의 몸과 마음을 바치며 집중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지요.

나의 유년의 뜰은 나 혼자하는 여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나의 어머니는 참 지혜로우신 분이었어요. 방학이 되었어도, 가족 여행이라는 호사를 누리지 못할 형편이었지요. 어린 딸의 적적함을 몸소 직접 덜어줄 수는 없었던 그때, 방학만 되면 큰 언니가 근무하는 해남이나 장성 큰아버지 댁으로 혼자 버스 태워 보내셨어요. 버스비만 들이면 식비와 숙박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들이었지요. 머리 야무지게 묶어서, 시장에서 색깔 고운 옷 사 입혀서 일주일 이상 여행을 보내셨어요.

50여 년 전 어느 여름, 어머니는 어린 나를 혼자 버스에 태워 해남 북평면 작은 초등학교에서 방학 근무를 하는 언니에게 보냈어요. 세 시간이 넘게 완행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어요. 깜짝 놀라 깨어 북평이라는 버스 정거장 표시만 보고 내렸는데, 몇 정거장 먼저 내려버렸나 봐요. 어둠이 몰려오는 낯선 정거장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짠하게 생각한 운전사 아저씨들 덕분에 늦은 밤 마침내 큰 언니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기억이 이젠 추억이 되었네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우리 어머니가 여행으로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신 장본인이시네요.

방학이 되면 방문 필수 코스였던 큰아버지 집은 장성 남면 삼태리였어요. 넓은 마당에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개, 소, 닭 그리고 오리들도 키웠어요. 큰엄마, 큰아버지, 사촌오빠 내외랑 내 또래의 사촌 오빠 언니가 함께 살던 집이었어요. 여름에는 집 앞에 바로 마을 공동 우물과 제각(祭閣)이 있어서 심심치 않게 놀았어요. 광주 아가씨 왔다고 큰 올케는 마당에서 놀던 닭 한 마리 어김없이 삶아내 주셨고요. 겨울이면 방 안에서 화덕에 고구마 구워먹으며 배 깔고 누워 맘껏 만화책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농촌 마을은 닭 우는 소리로 하루를 일찍 시작했어요. 일찍 일어나 아련한 아침 안개가 깔린 마을 논둑 밭둑을 걷던 그 상쾌함을 잊지 못해요. 그것이 참 특별하다는 생각을 한 듯 합니다. 그래서 어느덧 나의 소망 중 하나는 사철 풍경이 변하고, 시냇물이 옆에 흐르는 낮은 산 중턱에 창 넓은 아담한 흙집에 사는 것이었어요. 집 옆 텃밭에서 파, 부추, 방앗잎을 바로 뜯어 전을 부쳐 사랑하는 이들과 나눠 먹는 생활을 늘 꿈꾸었어요.

이제는 내가 곧 유년을 맞이할 사랑하는 손녀의 할머니 전원(田園)이 되고 싶습니다. 손녀가 겁 없이 혼자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에요. 나는 반갑게 뛰어나가 어서 오라~!!고 맞아 줄 겁니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에게 우리 손녀를 소개하고, 자랑할 겁니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왔다고. 벽난로 속에서는 장작이 타오르고, 고구마 굽는 냄새가 풍기겠죠? 할머니가 읽은 책을 손녀가 꺼내 읽기도 하고, 손녀가 가져 온 책을 할머니가 또 읽겠죠. 오래 묵은 생각과 젊고 유쾌한 아이의 책 소감을 알콩달콩 나누며 그 겨울 시골집 장면을 완성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내 유년의 여행을 돌아보고 내 소망을 얘기하였더니 마음이 참 따뜻해지네요. 책이 가져다 준 행복이니 책에게 감사합니다. 여행하고 책을 읽는 것처럼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