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수 수필가 문학박사 호남대 외래교수 |
생전의 할아버지께서도 습관처럼 마당을 쓸곤 하셨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 마당에서 뛰어놀 때가 좋았다. 땅따먹기나 공기놀이를 할 때마다 손에 닿던 그 보드라운 흙의 감촉이란…. 집주인이 되어 십여 년이 넘는 동안 뜰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흙 마당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텃밭을 떼어 내고, 다실(茶室)로 사용할 별채 자리도 제법 잘라냈다. 거기다 남편은 유실수를 심으려고 호시탐탐 내 땅을 노리고 있다. 심지어는 오다가다 들른 동네 사람들은 감당을 못하니 잔디를 심으라고 틈만 나면 종용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사연들이 있기는 했으나 꿋꿋하게 흙 마당을 꾸려 가고 있다. 달과 별이 돋는 밤, 반들반들 닦아진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라도 피우노라면 하늘도 땅도 인간도 하나 되어 어우러진다. 마당에만 서면 이상하게도 할머니 치맛자락 움켜쥐고 종종거리던 추억의 5일 장이 떠오르곤 한다. 먹거리, 볼거리, 재밋거리 등 없는 것이 없이 넘쳐나던 그곳은 그야말로 온종일 휘청휘청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5일 장에 갈 때마다 시장에 간다가 아니라 마당을 뜻하는 ‘장(場) 보러 간다’, ‘장(場)에 간다’라고 했다. 장(場)은 이미 시장을 뜻하는 고유어가 되어있지만, 5일 장은 단순히 물건만을 사고파는 마트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근동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저물녘까지 한마당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場)이었다고나 할까.
농사에 의지하며 살았던 그 시절의 마당이란 요즘 푸른 잔디가 깔린 서양식 정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서양식 정원이 시각으로 즐기는 공간이라면 우리의 마당은 몸을 담고 활동하는 생활의 공간이었다. 추수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타작을 하는 일터이며, 멍석을 깔고 곡식과 채소를 널면 독특한 풍경의 건조장이 되었다. 평상 하나를 턱 놓으면 가족의 쉼터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명절 때마다 펼쳐지던 마당놀이이다.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도, 한가위 달빛 아래서 보름달보다 더 환한 얼굴로 고모, 언니들이 펼치는 강강술래도, 온 마당을 웃음바다로 만들던 아래 뜸 당숙모의 ‘꼽추 춤’도 모두 동네 어느 집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마당굿 놀이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자면 국가적인 행사로 민가는 물론이고 궁중에서까지 펼쳐지던 ‘나례희’와 ‘산대놀이’로부터 시작해 악공집단인 광대들의 ‘사당패 놀이’는 민중들의 애환을 풀어 주는 유일한 위안물이었다. 한때 영화 ‘왕의 남자’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유 역시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정서 안에는 한마당 질펀하게 어우렁더우렁 하고 싶은 심사가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무대라는 공간이 감상하는 것에 그치는 공연자 것이라면, 마당은 흥이 나면 언제든 뛰어들어 함께할 수 있는 관람자 것이라고나 할까. ‘강남 스타일’이라는 노래와 춤이 세계적인 붐을 일으킨 것도 가수가 공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중이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을 풀어낼 수 있도록 마당을 펼쳐낸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춤을 전혀 몰라도 그저 말처럼 뛰기만 하면 하나가 되어버리는 그 통쾌함이란!….
여기저기서 ‘설 자리(마당)가 없다’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공부 잘하는 청소년만이, 근사한 직업을 가진 젊은이만이, 부유하고 건강한 노인만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다. 사회 곳곳에 뛰어난 주연들이 공연하는 무대는 난무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함께할 만한 마당을 만나기는 어렵다. 1인 가구 수가 40%에 육박하고 ‘고독사’나 ‘극단적 행위’ 같은 말도 하루가 멀다 하게 들려오고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던 그 옛날의 열린 마당이 새삼 그립다. 누군가 온다는 약속도 없는데 대문 빗장을 활짝 열어놓고 오늘도 정성을 다해 마당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