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새해에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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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새해에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지이다”
박영덕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수필가
  • 입력 : 2024. 01.11(목) 15:01
박영덕 수필가
지난 세밑, 스마트폰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김없이 새 노트를 준비하여 첫 장에 다가올 새해의 계획을 정성껏 써넣었다.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독서, 정말 좋은 사람들 만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 것, 무엇보다 건강할 것 등등. 하나 같이 힘에 부치는 일이었고 아나로그적 새김이었지만 나는 꼭 그렇게 노트에 결심을 적어두고 새해를 맞는다. 언론 방송 매체에서도 명사들의 새해 설계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나이 드신 분들일수록 말씀이 조촐하고, 그중에는 ‘계획을 세워보아도 매양 성취가 보잘것없으니 차라리 그날그날을 성실히 살아가겠노라’는 겸손하고 솔직한 답변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해가 바뀌는 대로 곧장 다른 세상이 올 것처럼 새로운 계획에 자못 비장해져 있는 내 초등학생 같은 용기가 나이 들어도 물정 모르고 철 들 줄 모르는 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이나 어른이나 간에 새해를 살기 위한 새 결심이란 상찬이요 덕담이 아닌가.

한 해를 마감하는 마당에 서서 수지타산의 결산을 내어보면 번번이 의지박약과 용두사미의 자신을 배반의 쓴맛으로 맞닥뜨리면서도 계획을 세우는 마음은 번번이 기쁘고 기대에 들뜬다. 그것은 이제 것의 과오와 실패를 딛고 일어나 새로이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속에 씨앗을 품고 있듯이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가능성 때문에 더욱더 귀한 것이다.

지난해는 이상스레 자주 병을 앓았다. 자신했던 건강에의 적신호는 큰 병의 전조처럼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동반했다. 때론 병이 일상에서의 일탈, 정화작용을 한다고도 하나 내 경우에 병이란 철저한 유기였으며 고통을 뜻했다. 아직도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때에 이르지 못한 탓이다. 얼마를 더 살아내야 때에 이르는 걸까. 떨어지는 링거 방울의 수를 세면서 병에 지지 않을 궁리들을 손꼽아 봤다. 연전 고령의 무의탁 노인들이 생활하는 양로원에 간 적이 있다. 병들고 노쇠하여 생의 끝머리에 선 노인들이 채소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지는 충격과 감동이 밀려왔다. 씨를 뿌리는 마음에는 해를 기다려 결실을 보고자 하는 기대가 들어 있을진대 더 이상 내일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희망이 거기 있었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시작을 꿈꾸는 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장하다. ‘너무 늦지 않았는가’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고무적인 말이 준비되어 있고 ‘시작이 반’이라는 북돋움의 말도 있다. 깊은 실패의 늪에 좌절하거나 용기와 자신감을 잃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자, 다시 시작해 보자. 너는 잘할 수 있어’라는 따뜻한 등 두드림은 얼마나 큰 힘과 위무가 될 것인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것은 없고 새로워지려는 마음이 없으면 새로움이란 없을 터이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망, 변화에의 열망이 없다면 매일매일, 모든 일과 관계는 똑같이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상의 궤적에 지나지 않으리. 한겨울 방안에 개나리를 키우며 다만 봄을 기다리듯 그렇게 지낼 수야 없지 않은가.

인생이 우리에게 살아 볼만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미덕은 많이 있고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실패와 좌절을 털어내고 일어나 다시금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생의 커다란 덕목이다. 신이 준 우리의 특권이고 무상의 선물임을 알기에 나는 순백의 노트를 준비하여 그다지 미덥지 않은 자신에게 한 해의 성취를 걸어 보는 이 어리석은 작업을 기꺼이 되풀이 한다.

성탄절, 서예를 하시는 신부님으로부터 ‘청이허(淸而噓)’라는 글을 선물 받고 몹시 기뻤다. 마음에 잡된 생각이 없이 맑고 깨끗 하라는 뜻의 그 글에서 노추(老醜)를 경계할 나이가 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뭔가 좌표를 잃고 부유하는 듯 한 내 심신에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기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설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마음의 위안이며 은혜로운 일이랴. 나는 새해 첫날 해맞이 대신 ‘청이허(淸而噓)’를 맞았다. 새해에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