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공연 장면.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Eugene Onegin, 1879> 역시 사나이들끼리 행해지는 가장 강렬한 러시아 결투가 삽입돼 있다. 러시아에서의 결투는 유럽식과는 달리 다섯 걸음 후 돌아서서 서로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방식인데 가까운 거리 때문에 치명상을 입거나 죽는 이들이 허다했다.
이 오페라의 원작자인 작가 푸시킨(A. Pushkin, 1799-1837) 자신도 1837년의 결투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레르몬토프 같은 러시아 문호들도 결투를 테마로 한 작품을 집필했는데 이 중 비평가들에게 ‘푸시킨의 적자’로 불리며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울 쓴 레르몬토프 역시 결투를 벌이다가 불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부분 결투의 계기는 눈이 마주쳤다거나 천한 언변 등으로 인한 사소한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푸시킨의 경우는 동성애자로 의심한 프랑스의 조르주 단테스 남작이 아내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결투를 신청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필자의 기억에 가장 아름다운 명작으로 기억되는 오페라는 2001년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올려진 차이코프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이다.
당시 노년의 나이에도 깊이 있는 목소리를 가진 그레민 공 역의 베이스 ‘니콜라이 기아우루프’와 그의 아내로 세계를 호령하던 타티아나 역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은퇴 전 마지막으로 둘이 함께 선 무대라 더욱 기억이 남는다. 화려한 무대와 어우러진 러시아의 전통무용과 함께 이 오페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장면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너른 벌판 위의 결투 장면, 영화와 다른 현장에서 직관하는 사나이들의 결투…. 관객들은 침묵 속 권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우수에 젖은 음악 안에 동화돼 결투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함께 춤추는 장면.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
렌스키와 함께 시골을 방문한 오네긴을 본 타티아나는 첫눈에 반해 그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다음 날 아침에는 그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지만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자신과의 결혼은 불행이라며 거절한다. 다음 날 저녁, 라리나 집안에서 타티아나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오네긴은 타티아나와 춤을 추기도 하며 많은 사람과 함께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이런 시골 생활을 지겨워했던 그는 장난삼아 렌스키에게 도발하기 위해 그의 약혼자인 타티아나의 동생 올가를 유혹해 춤을 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렌스키는 질투에 눈이 멀어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결투하게 된다. 끝내 오네긴은 렌스키를 총으로 쏴 죽이게 되고 자책한 오네긴은 몇 년간 정처 없이 여행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타티아나를 만난다.
결혼해 그레민 공의 부인이 되어 있는 타티아나는 우아하고도 품위 있는 모습이었으며 오네긴은 자신에게 사랑 고백을 하던 과거의 타티아나와 겹쳐 생각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자신에게 보냈던 것처럼 러브레터를 그녀에게 보낸다. 오네긴의 편지를 받고 번민에 빠진 타티아나에 앞에 오네긴이 나타나 무릎을 꿇으며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 모습을 본 타티아나는 오네긴의 서신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그녀는 “당신을 아직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정절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오네긴을 떠난다. 오네긴은 “부끄럽다! 고통스럽다! 이 잔인한 운명!”이라 절규하며 쓰러지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현재 연주되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의 수정을 걸쳤다. 초연 당시에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국 타티아나가 오네긴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남편인 그레민 공이 나타나 보게 되고, 타티아나는 정신을 잃고 오네긴은 “오 죽음이여, 오 죽음이여! 너를 찾아 나선다!”라고 울부짖으며 뛰쳐나간다. 그리고 1년 후, 볼쇼이 극장 공연에서는 차이코프스키가 마지막 무대 지시를 바꿔 초연 마지막에 등장했던 그레민 공 장면을 없애고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며 지금까지 이 연출로 오페라가 올려지고 있다.
오네긴 역의 드미트리 흐보로톱스키와 타티아나 역의 르네 플레밍.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라는 오페라의 특성 때문에 러시아 문학의 성격이 반영돼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물이 중심이 되며 이 광활함을 담기 위해 귀에 익숙한 남녀 주인공의 아리아가 아름다운 벨 칸토 오페라보다는 교향악과 대형 합창단의 웅장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화려한 무용과 장대한 스케일의 무대 역시 관람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에서는 자주 러시아 오페라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러시아 발레 작품은 꾸준히 올려지지만, 러시아 오페라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 오페라에 대한 이해 부족과 언어의 어려움, 그리고 장대한 스케일의 무대를 제작의 난해함과 이질적 느낌은 지방 극장에서는 난해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문화 다양성 측면과 우리 지역의 공연 제작의 스케일 확장을 위해 광주에 러시아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진다면, 보로딘이나 무소르그스키의 작품보다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은 어떠할까? 결투가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렌스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오네긴. 이때 하늘에서 내리던 새하얀 눈발, 로마에서 만났던 두 청년의 결투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광주에서 관람할 날을 기대해 본다. 최철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최철 교수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에 차이코프스키가 곡을 부친 것으로, 렌스키가 결투를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