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리 마을 풍경. 해동사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마을 길과 담장이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이돈삼 |
죽산안씨 문중에서 처음 지은 한 칸짜리 사당 해동사. 사당 안에 지은 또 하나의 사당이다. 이돈삼 |
죽산안씨 사당인 만수사. 만수사에서는 고려후기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 안향 등의 학덕을 기려오고 있다. 이돈삼 |
장흥 만수마을은 속이 꽉 찬 마을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알려진 마을이 아니다. 70년 가까이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면서 결코 요란을 떨지 않았다. 알아달라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내 식구 밥그릇도 챙기기 버거운 시절부터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해왔다. 소리?소문 없이 우리 국민과 나라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서,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 장흥의 죽산안씨 문중에서 안 의사 사당을 건립했어요. 안 의사의 뿌리인 순흥안씨가 죽산안씨의 큰집이라고 합니다. 한 핏줄이죠. 지금은 고인이 된 안홍천 선생을 중심으로 안씨 문중의 어르신과 지역 유지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서 한 칸짜리 사당을 마련한 것입니다.”
해동사에서 만난 정형구 장흥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장흥사람들이 죽산안씨 사당인 만수사(萬壽祠)에 한 칸짜리 안 의사 사당 해동사 지었다는 것이다. 사당 안에 또 하나의 사당을 지은 셈이다. 공간이 좁았는지, 만수사와 해동사의 지붕이 바짝 붙었다. 만수사에서는 고려후기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 안향 등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해동사 건립을 이끈 안홍천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찾아가 친필 휘호 ‘海東明月(해동명월)’을 받았다. 동쪽을 밝히는 밝은 달, 우리나라를 밝게 비춘다는 의미를 담은 글귀다. 휘호는 해동사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해동사 입구에 안홍천(1895∼1994)의 공덕을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해 10월 27일 안 의사의 딸 현생과 조카 춘생이 참석한 가운데 위패 봉안식이 열렸다. 딸은 영정을, 조카는 위패를 모셨다. 전국에서 1만여 명이 찾아와 안 의사의 애국혼을 기렸다. 영정과 위패를 앞세운 행렬이 장흥읍내 동교다리를 건너는 모습과 봉안식을 마친 참가자들의 기념사진을 해동사에서 볼 수 있다.
장흥사람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동사에서 안 의사의 순국일인 3월 26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국땅에서 순국한 안중근,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사당이 장흥에 만들어진 배경이다.
해동사(海東祠)는 안중근(1879∼1910) 의사를 모신 첫 번째 사당이다. 안 의사의 유가족이 직접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현판 글씨를 당시 대통령이 쓰고, 정부를 대표한 문교부 국장이 봉안식에 참석했다. 유가족과 나라에서 인정한 하나뿐인 안중근 사당이다.
지금의 해동사는 2000년에 다시 지었다. 안 의사 순국 90주기에 맞춰 국비와 지방비를 들여 세 칸 맞배지붕으로 넓혔다. 해동사 일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사당 앞에는 넷째 손가락(藥指)이 잘린 안 의사의 손바닥 도장을 그대로 떠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아들에게 전했다는 어머니 조마리아의 말도 안내판으로 세워져 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네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태극 문양이 장식된 사당에는 안 의사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 벽에는 바늘이 오전 9시 30분에 멈춘 낡은 괘종시계가 걸려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총으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쏜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저격 직후 안 의사는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다. 안 의사는 이듬해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영정 왼편에는 안 의사가 생전에 남긴 글씨가 걸려있다. 極樂(극락), 第一江山(제일강산), 孤幕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보물로 지정된 유묵의 복사본이다.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는 말에서 안 의사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묵묵히 안 의사의 제사를 지내 온 만수마을 사람들의 품성과도 닮았다.
만수(晩守)마을은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속한다. 용두산 아래로 만년·장항·삼정마을과 함께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인천이씨가 처음 들어와 오래 살며 자손이 번창했다고 ‘만손(萬孫)’ ‘만수(萬壽)’로 불렸다. 지세가 좋고,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땅도 넓다.
마을회관 앞에 팽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옆으로 만수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1950년대에 쌓은 저수지다. 극심한 가뭄에도 저수지를 가득 채운 물이 주민들의 농사 걱정을 덜어준다. 저수지에는 청둥오리 무리가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다. 힘찬 날갯짓으로 물 위를 나는 시범도 보여준다.
마을에 호계사(虎溪祠)도 있다. 남강 김영간을 모시는 사당이다. 김영간은 중종 때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장흥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서원철폐령 때 헐린 부산면 호계리의 사우를 옮겨 지은 것이다.
전남대학교 총장을 지낸 최상채 박사의 묘도 만수마을에 있다. 장흥에서 난 고인은 광주농대와 목포상대·광주의대·대성대학을 통합해 전남대학교를 설립할 때 크게 기여했다. 1952년 4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초대, 제2대 총장을 지냈다. 전남대학교 교정에 동상도 세워져 있다.
만수마을로 드나드는 길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 몇 년 전까지는 농로였는데, 이제 대형버스도 부담 없이 오갈 수 있게 됐다. 마을회관 앞에 버스 주차장도 만들었다. 전남도와 장흥군이 추진한 해동사 성역화 사업의 결실이다.
해동사 앞에 안중근 의사 추모역사관도 짓고 있다. 올 하반기에 문을 열 역사관은 안 의사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실과 방문객 체험실 등으로 꾸며진다. 마을과 역사관을 잇는 길에서 안 의사와 독립운동 이야기를 보여주고, 역사관 앞에 안중근 상징 조형물도 설치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면면히, 그러면서도 조용히 이어온 만수마을이다. 앞으로도 안 의사의 혼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쉴 만수마을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