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상황이 정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오미크론이라는 신종 변이바이러스가 창궐하며 신규 확진자가 삼십 여만 명에 이르는 게 보통인 일상이 되었다. 물론 기저질환자나 노약자가 아니면 그 병증이나 병환이 목감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게 보통이어서, 감염증만 빼면 흔한 말로 별 것 아닌 목감기 바이러스 정도로 슬슬 치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서서히 내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목포작가·임혜주 시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따라서 정부에서는 해외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로써 정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는 '위드 코로나'라는 용어 대신에 단계적 일상 회복이라는 단어를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사회적 용어이기 이전에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with'와 '코로나19'가 합성된 위드코로나 시대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눈이 다음날 새벽에 내려졌다, 버려졌다/눈물이 겨울 2월 새벽에 망설였다/내가 사는 광주엔 2년 넘게/나보다 의미 있는 오미크론이 살아가고 있다.'(문학들·박석준 시 '깁스 상률')
그러한 위드코로나시대의 남도문학은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걷고 있는가를 지난 연말과 봄에 걸쳐서 나온 문예지들을 통해서 짚어보았다. '벽을 만들어 속을 들키지 않은 밤들은' 그대로 남도의 문인들에게도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비대면시대 다음엔 저지능시절이 온다는데/울애기 넌 어쩌나'(물과별 창간호·주정연 시 '딩가송')
우리들은 지금껏 적당한 시기가 지나가면 코로나19가 지나가리라는 의미에서 흔히 포스트코로나시대를 호명하거나 갈망해왔다. 하지만 벌써 2년여가 흐른 코로나19 상황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음과 아울러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였다.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하였다.
'우럭과 가자미 몇 마리/손질을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무 몇 개 상추 몇 단/단출하게 바닥에 놓고 앉은/노파의 눈 속에 사는 물고기//…세상 밖으로 나온 그를/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시와사람·이명윤 시 '불편')
자본주의를 넘어서 신자유주의가 만개한 우리 사회에서 어두운 그늘이나 힘없는 약자들은 필요악도 못되는 무관심의 영역이었다. 아니 무관심을 넘어서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현실이 코로나 상황을 거치면서 함께 가야할 연대의 소통의 대상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국경도 방역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전염되는 코로나는 그대로 '전체'의 '안정'이 아니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살아있는 생령이었다.
'느티나무의 시큰한 발목에 얹히는 햇살/노선을 우회하며 휘어지는 가지/나의 절망이 깨어나는 소리 듣네/구름, 박새, 신발, 의자, 그리고 시와…/결기의 초록을 보네'(광주전남작가·김미승 시 '초록을 위한 파반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시큰한 발목에 얹히는 햇살'과 '휘어지는 가지'도 '노선을 우회하며 휘어지는 가지'들을 통해서 곧 '절망이 깨어나는 소리'를 우리의 이웃이었던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생명을 통해서까지 '초록의 결기'를 느끼고 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한다.
'담담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안다/결코 흩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 기어코/ 다시 살아 돌아오는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어느 해 여름은 아지 시작되지 않았음을'(시와사람·이노나 시 '어느 해 여름의 죽음')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