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4>【광주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 ① 약사암 석불에서 석굴암 본존불을 보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4>【광주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 ① 약사암 석불에서 석굴암 본존불을 보다
19세기 ‘광주 무등산도’에 약사암 처음 등장
  • 입력 : 2020. 12.10(목) 12:44
  • 편집에디터

무등산 약사암. 새인봉이나 중머리재를 가다가 한 번쯤은 물이라도 마시러 들렀음직한 암자. 그 암자 대웅전에 앉아계신 돌부처. 얼핏 경주에 계신 그 어떤 돌부처와 살짝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약사암 석불은 그동안 베일에 싸였다 할 정도로 그 정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 문헌이나 일제강점기의 각종 자료나 문서, 심지어는 신문에서조차 그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약사암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읍지에서 전혀 모습을 찾을 수 없다가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서부터 雲谷里의 약사암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1879년 「광주읍지」에 실린 <광주지도>에는 '藥寺'로만 기록되었을 정도다. 이미 3년 전인 1921년 11월 9일 4면 '每日申報' 신문 기사에 '광주약사암낙성光州藥師庵落成'이라며 광주 증심사 약사암 낙성식을 지난 3일에 당시 주지 박병운朴秉云 씨와 치른 사실을 기록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약사암은 일개 폐사지에서 증심사의 암자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할 뿐이다.

그나마 '광주군사光州郡史'(1934, 광주군교육회, 53~55쪽)에서는 연혁 편에 "증심사와 같은 시대에 철감국사에 의해서 창설된 것이나 그 후 중창 또는 중수 기록이 없는 것도 필시 증심사의 부속 암자로써 동시에 행하여졌을 것이다."라는 정도의 간단한 이야기만 전한다.

다행히 약사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광주 무등산도」(19세기)에는 약사암藥師庵의 모습이 아주 자세하다. 주변으로 돌담이 둘러 쌓여있고 팔작 기와지붕 건물 2채를 배경으로 마당에는 상륜부까지 잘 남은 5층 석탑이 우뚝하다. 석불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두 건물 중 하나의 내부에 모셔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약사암은 적어도 19세기 후반경에는 불전과 석탑이 온전한 형태로 유지된 정상적인 암자 형태로 세상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동네 이름 없는 돌부처에서 보물이 되기까지

동네 뒷산 이름 없는 돌부처였던 적이 많았던 무등산 약사암 석불. 보물로 지정될 정도의 예술성이 집약된 신앙대상 조형물이 여태까지 아무런 기록도 없다가 어쩌다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천이백 년의 세월 동안 동네 주민과는 함께해 왔던 돌부처. 어디 땅속에 있다가 갑자기 솟아난 것도 아닌데, 석불 조성 당시인 9세기 때의 절 이름도 모른다는 것만큼이나 예사롭지 않다.

인근 주민들이야 예전부터 폐사지 돌부처 정도로 알고 있었겠지만 문화재적 의미로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해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척되면서 신라 하대 9세기쯤 조성된 아주 희귀하고 잘 보존된 불상이라는 보고서가 제출됨으로써 1975년 8월 4일 보물 제600호로 승격하는 경사를 맡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벙글어진 연꽃밭 속 같은 앙련과 복련, 그 조화로움의 극치

30년 이상 수십 차례 약사암 석불을 뵙고 이곳저곳 살펴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광주읍내 철불'(증심사 철불) 이상으로 광주 불교 조각사 첫머리 정점에 놓일 예술품으로서 그 대단한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아쉽게도 약사암 석불은 아직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다. 건물 내부의 조명만 측광으로 잘 비춰주었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예술성이 오롯이 드러났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대좌에 조각된 연꽃무늬나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무릎에 덮인 옷자락, 선정에 든 표정 등을 살릴 수 있는 수준의 조명을 갖추지 못해 시각적 평가가 인색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다.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같은 앙련과 복련의 조화로움을 뽐낼 수 없게 불단에 가려놓아 매우 안타깝다.

증심사 유물보다 더 오래된 약사암 석불과 석탑

약사암 석불은 유물로만 따져보자면 증심사의 그 어떤 문화재보다 조성연대가 오히려 더 빠르다. '증심사 철불'은 광주읍내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옮겨 온 것이니 제외해야 한다. 증심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삼층석탑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만 보아도 약사암 석불은 적어도 100년 이상 빠른 시기인 신라 하대 9세기에 조성된 유물이다. 더구나 약사암 마당에 복원된 삼층석탑도 증심사 삼층석탑 보다 그 제작연대가 더 빠른 9세기 유물이다. 이처럼 유물에서 발견되는 역사적인 사실은 약사암이 먼저 개창되고 적어도 100년 뒤에 증심사가 법등을 밝힌 것이 증명되었단 사실이다. 지금과는 정반대 현상이다.

삼각형 구도 속의 안정감

무수한 고행 끝에 막 해탈을 이룬 아직 신성성을 갖추기 전의 보살 같은 부처님. 잘록하다 못해 홀쭉한 허리는 고행에서 오는 야윈 모습처럼 애잔함을 자아낸다. 어깨와 허리를 지나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옷자락은 비단처럼 착 달라붙은 채로 온몸을 감싸고 마지막 한 자락을 내어 발아래에 부채꼴로 펼쳐놓았다. 하대석에는 세상의 연못에 핀 연꽃을 드리우고 상대석에는 천상의 연꽃을 가져다 부처의 몸을 떠받들게 설계한 석공의 지혜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불상과 대좌의 비율이 주는 안정감

약사암 석불은 불상의 신체가 대좌보다 과도하게 커 중압감을 주는 8세기 석불 경향에서 벗어나 신체와 대좌 높이의 비율이 1대 1로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9세기 석불의 특징이 잘 반영되었다.

비록 다소 거친 질감의 화강암 석재이지만 신체나 연꽃무늬들을 섬세하게 표현한 점은 약사암 석불의 매력이다. 이러한 유형의 불상은 석굴암을 정점으로 발전하여 그 이후에는 전형적인 양식은 점차 사라지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모습으로 계승되었다. 약사암 석불도 그러한 특징이 담겼다. 의도적으로 삼각형 구도 틀 속에 인체를 재구성하여 안정감을 유도하였다. 묵직한 무게감과 경직된 추상성을 통해 신성성을 강조하려는 이와 같은 조형성은 대체로 9세기경에 보편화 되었다.

참배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지금은 약사암의 번듯한 기와집인 대웅전 안에 주존 부처님으로 조석으로 예불과 사시마지巳時摩指를 드시지만 폐사지 돌부처인 시절에는 무등산의 세찬 눈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몇백 년을 지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접어진 엄지손가락을 약함으로 오해해서 약사불이라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조차 약사불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을 정도다. 예전에는 현장에 오지 않고 사진만 보고 해설하는 학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시각적 착오로 인해 발생한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광배는 없어졌으나 불상과 대좌는 어디 하나 상한데 없이 잘 보존되었다. 안정감을 주는 넓은 무릎, 가녀린 듯 아담한 어깨의 당당함, 높지 않은 살 상투와 둥글넓적한 상호에선 전형적인 전라도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받듯이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등 뒤로 약간 물러나듯 앉았지만 참배자와 시선을 마주하려 살짝 머리를 앞으로 숙여 눈길을 준다. 몸의 중심도 상대석 정중앙과 서로 어긋나지 않고 꼭 맞는다.

1. '藥寺'(1879년 「광주읍지」 )

2. '光州藥師庵落成'(每日申報, 1921년 11월 9일 4면)

3. '藥師庵'(「광주 무등산도」, 19세기, 사진 영남대학교 박물관)

4.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옛 사진(1979년 이전, 사진 한국의 미 ⑲ 불상, 중앙일보사)

5.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앞면(사진 문화재청)

6.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옆면(사진 문화재청)

7.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앞면 2(사진 문화재청)

8.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앞면 2(사진 다음 블로거)

9.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앞면 2(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