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3>【괘불탱・괘불지주】 ⑥ (完)나주 죽림사 괘불, 국내 최초 괘불의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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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3>【괘불탱・괘불지주】 ⑥ (完)나주 죽림사 괘불, 국내 최초 괘불의 시원
  • 입력 : 2020. 11.26(목) 12:48
  • 편집에디터

1. 죽림사 괘불 전체(1622년, 사진 문화재청)

죽림사 괘불탱 세부 모습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 등장한 임금의 귀처럼 팔랑거릴 것 같은 길게 늘어진 장대한 귀는 매우 인상적이다. 짧은 목에는 삼도를 선으로 가슴까지 내려오게 묘사하였다. 어깨는 당당하며 꽃무늬가 화려한 붉은 색 가사를 둘렀다. 승각기는 명치를 겨우 가린 정도이다. 그 위에 걸친 가사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감아올려서 승각기 발아래에 감췄다. 가사 모서리는 도장으로 찍은 듯한 국화문을 촘촘히 장식하였다. 오른발을 왼 종아리 위에 얹은 반가부좌이다.

대체로 붉은색 기운이 괘불 전면에 감돈다. 가사와 키 모양과 광배 외곽 띠와 연화대좌 하단이 적색조이다. 광배 내부와 오색구름 일부와 가사 안쪽은 녹색조로 외곽의 붉은색 보색 효과로 색조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다. 꽃무늬가 장식된 구름과 연화대좌는 황색조이다. 연화대좌 측면은 청색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전체적으로 연한 색의 선묘가 가늘고 섬세하다. 아울러 얼굴을 위시한 가슴・팔・발의 노출된 몸의 맨살에는 생동감과 입체감이 한층 풍부해졌다. 연지를 바른 것 같은 볼 빨간 얼굴과 귓바퀴 속, 목 주변으로 붉은색 기운이 바림질하듯 그 빛깔이 은은하다. 마치 초상화에 구현된 배채법背彩法(뒷면에 색을 칠하여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화법)처럼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하다.

17세기 이후 괘불과 '영산회상도'의 모범 작인 석가독존상

죽림사 괘불은 석가세존의 중후한 표정과 붉은 색조가 화사하면서도 품격 높은 색채 감각이 독보적인 작품으로 조선 초기와 후기를 연결하는 17세기 불화의 양식적 특정을 잘 갖추었다. 석가세존은 단독의 좌상이면서 5m가 안 되는 아담한 크기이다. 이는 후불벽화의 전통이나 고려와 조선 초기 2m 내외의 소형 불화에서 대형 후불탱화나 괘불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기적 양상이다. 임진・병자 양대 전란 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괘불을 제작했다기 보다는 전각 복구 이전에 임시로 예불을 보기 위해 걸게 그림 형태의 독존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또 이러한 석가 독존상 괘불 양식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는 제작되지 않고 삼존상이나 군상도 형태의 '영산회상도'로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의 후불벽화 묘사 방식이 계승된 점이 눈에 띈다. 무위사 아미타 후불벽화와 유사한 키형 광배를 비롯해서 통견의 가사 형태와 발목을 감싼 나뭇잎 모양의 초록색 털은 '회암사 약사삼존도'(156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흡사하다. 이러한 잎사귀 모양의 표현은 17세기 석가모니 좌상에 흔히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이후에는 그려진 사례가 드물다.

조선 초기에서 계승된 형식과 함께 죽림사 괘불에서 완성된 화풍의 영향은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의 불화에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17세기 군상의 '영산회상도'의 주존좌상이 주류를 이루는데 동일한 자세와 형상미는 보살사・안심사・영수암・화엄사의 '영상회상도'에 잘 구현되었다. 키형 광배, 법의 형태, 상호와 수인의 표정, 발목의 혈, 초록색의 수염과 눈썹 표현 등의 세부묘사가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후대에 내려오면서 형태나 색감의 중후한 맛보다는 좀 더 장식적이면서 채색이 짙고 선명하고 화려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양식적 전형을 기반으로 조선 후기 18세기 탱화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죽림사 괘불 기록

1990년대 초에 괘불궤 안에서 괘불을 들어낼 때 사용하는 도구들과 괘불 복장낭 한 개를 확인하였다. 복장낭은 오곡과 약재가 행엽형杏葉形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어 습기와 미생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게 하는 방습과 방충효과를 위해 탱화(괘불) 제작시 필수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수종분석 결과 괘불 상하축은 소나무이고 괘불궤는 은행나무이며 괘불궤 나무 못은 대나무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괘불과 후불탱화나 벽화의 화기는 하단 좌우에 위치하나 죽림사 괘불은 하단 정중앙에 하나만 마련되었다. 화기에는 괘불을 제작한 사찰과 제작연대, 시주자 및 괘불을 그린 사람, 거주한 승려 등을 먹으로 기록하였다.

제작연대 고증

화기의 내용 중 제작연대는 '천계삼년임술天啓三年壬戌…'이다. '천계天啓'는 중국 명나라 희종대에 사용한 연호로 천계삼년은 서기 1623년이다. 임술년은 서기로 1622년으로 연호와 간지가 1년 정도 차이가 발생한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조선시대의 경우 새로 바뀐 연호 초기에는 연호와 간지가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러한 경우는 간지를 택하는 것이 금석학金石學의 일반적 경향이어서 간지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면 '천계삼년임술'을 '천계이년임술'(1622년)의 착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성 봉안 사찰 훼손 변조

봉안 사찰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寺'만을 남겨놓고 먹칠로 덮어버리고 그 옆에 '죽림竹林'이라 새롭게 적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먹칠로 덮어버리기 이전에 원래의 절 이름을 긁어 버렸음이 확인되었다. 이 괘불은 죽림사에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죽림사로 옮겨진 것이다. 최근에 문화재보수 전문기관에서 적외선 판독을 해 보았으나 일부 글자 형태만 확인했을 뿐 글자의 전체적인 판독은 어려웠다고 한다.

'괘불탱' 용어 사용 최초 사례

어떤 용도로 무엇을 제작하였을까? 화기를 들여다보니 '□□사정중괘불세존탱□□寺庭中掛佛世尊幀'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사찰의 중정庭中에서 행해지는 야외법회용으로 제작된 석가세존괘불탱을 의미한다. '괘불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중정'이라는 괘불탱의 사용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화기의 내용은 기념비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죽림사 세존 괘불탱은 엄밀히 말하자면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마귀를 항복 받고 정각을 성취하였을 때의 깨달음을 지신地神이 증명했다는 상징적인 순간을 뜻하는 수인인 항마촉지인만 취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도상일 뿐이다.

시주 및 불사 소임자, 제작자

화기에는 시주자와 당시 불사를 맡아보는 소임자들과 작가(제작자) 명단이 뒤이어 등장한다. 기포(비단과 모시)대시주 시주는 고임길부부高任吉兩主이다. 공양대시주는 고용부부高龍兩主, 찬물饌物(반찬)대시주는 지선비구至善比丘이다. 승언비구勝言比丘, 한몽의 부부韓夢義兩主, 정인□부부鄭仁□兩主, 규辟□□가 시주자로 기록되었다. 증명은 신수愼受이다. 화사畵士는 수인首印과 신헌信軒이다. 별좌는 일원一元・□린□燐・경연비구敬連比丘이고 대공덕주는 혜은비구慧恩比丘이다. 시주자들 가운데 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위층은 아니지만 양반지주가 포함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지역의 부민층으로 여겨진다.

죽림사 괘불 원 조성 봉안 사찰은 어디일까?

화기의 적외선 분석도 별 소득이 없어 원 조성 봉안처를 밝히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인근 나주 운흥사지에는 가장 이른 시기 형식의 괘불지주가 2조가 발견되었다. 운흥사지와 죽림사의 거리는 22.7㎞로 지리상으로 매우 가깝고 도로 사정도 운반해 오기 쉽게 신작로가 잘 닦였다. 나주 금성산 보흥사 괘불이 가까운 다보사로 옮겨진 사례처럼 죽림사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운흥사지 괘불지주에서 마지막 희망을 품어본다.

2. 죽림사 괘불 상반신(사진 문화재청)

3. 죽림사 괘불 상호(사진 문화재청)

4. 죽림사 괘불 수인, 무릎, 대좌(사진 문화재청)

5. 죽림사 괘불탱 화기와 적외선 사진(사진 문화재청)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