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8>【괘불탱・괘불지주】 ① 괘불, 언제 왜 무엇 때문에 등장했을까?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8>【괘불탱・괘불지주】 ① 괘불, 언제 왜 무엇 때문에 등장했을까?
  • 입력 : 2020. 09.27(일) 15:19
  • 편집에디터

1.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원경(1700년, 사진 황호균)

괘불, 세계 유일한 걸개그림

괘불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우리나라에서만 꽃 피운 걸개그림이다. 이러한 괘불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갑자기 조성되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1592년~1598년)・병자호란(1636년~1637년)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의식薦度儀式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공교롭게도 괘불의 등장 시기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거치면서 전소된 사찰들에 대한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전란을 거치면서 승병의 활약으로 불교계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며 큰 사찰들이 대규모로 중수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괘불은 사찰 전각 재건 후 불상이 봉안되고 후불탱화를 갖추게 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함께 조성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대형의 괘불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과 기근・역병 등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천도재遷度齋가 개최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야외 법회에 필요한 괘불의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되어왔다.

괘불은 야단법석野壇法席

이처럼 괘불은 불전 안에서 지낼 수 없는 큰 규모의 법회나 의식 때 모시는 일종의 야외용 대형 불화로 석탄일・기우제・영산제 등 사찰의 큰 행사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의이다. 사찰에 몰려드는 많은 신도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전각 안 불단의 주존불상을 대신하여 야외에 불단을 마련한 일종의 야외용 걸개그림이다. 그래서 야외에 법단을 차려놓고 설법을 여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떠들고 소란스럽게 구는 것을 '야단惹端났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소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야단법석의 어원은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지만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그 모양이 성대하고 시끌벅적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괘불탱의 용례

괘불 하단 화기에 적혀진 기록에서 '괘불掛佛'・'괘불탱掛佛幀'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괘불재를 치르는 의식에 앞서 '불화를 건다'는 의미의 용례[掛-佛幀]로 미루어 '괘불掛佛'이라는 의식용 불화의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괘불 이운과 괘불대 설치, 괘불 게양

괘불은 평소에는 함(괘불궤)에 넣어 주불전 내부 후불벽 뒤에 보관하다가 괘불재를 치르는 날 아침 주불전 앞 마당(中庭)으로 옮겨와 사용한다. 미리 며칠 전 좌우로 넓게 벌어진 괘불지주에 괘불대를 세운 뒤 괘불대 아래에 뚫린 상・하구멍에 괘불지주와 연결되는 촉을 끼워 튼튼하게 고정한다. 괘불대를 세우기 전에 괘불대 끝에 오목하게 파내서 도르래를 끼워 넣게 만들어진 곳에 광목천에 연결한다. 괘불대를 세우고 나서 광목천 끝에 괘불 상단 고리에 연결한 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앞 위에서 광목천을 끌어당기면서 괘불을 들어 올린다. 완전히 높게 걸어진 뒤에는 바람에 펄럭이지 못하도록 앞・뒤쪽에서 '×'자 모양으로 광목천을 두른다.

이처럼 주불전에서 괘불을 옮겨와 펼치는 절차를 '괘불이운掛佛移運'이라고 한다. 괘불을 이운할 때 의식 동참자들이 암송하는 진언眞言과 게송偈頌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으로부터 내려와 설법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공양을 받은 불보살과 천도 받을 영혼을 불러 모아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는 의식에는 불교 음악과 무용・공양・시식施食의 모든 절차가 한데 어우러진다. 무엇보다도 괘불이운은 안전사고가 나거나 괘불이 손상되기 쉬운 과정으로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가장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른다.

괘불재 종류

괘불은 불보살에 대한 공양 의식인 상단권공上壇勸供에서 출발해 점차 이상적인 천도의식으로 체계화된 영산회靈山會[靈山齋]와 관련이 깊다. 조성 당시 화기에도 '영산괘불', '영산회 괘불'로 적어진 예가 많다. 영산회는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강설講說했던 인도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의 설법 모임으로 영산괘불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의식용 불화라는 의미와 영산회 의식에 걸리는 괘불이라는 의미이다.

영산회는 조선시대 불보살에 대한 권공勸供 의식으로 여러 종류의 재의에 앞서 행하는 재전작법齋前作法이었다. 의식의 목적이 살아있는 존재와 세상을 떠난 자의 화해이든[수륙재水陸齋] 오랜 가뭄 끝에 비를 비는 기우재祈雨齋이든 죽어서 갚아야 할 업을 생전에 미리 갚는 예수재豫修齋이든 간에 본격적인 의식은 영산작법으로 불보살에게 권공勸供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괘불재의 출발은 천도 의식

괘불을 거는 의식의 종류는 수륙재水陸齋・예수재豫修齋・사십구재四十九齋와 같은 천도 의식이나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성도재成道齋・불사를 마친 후의 낙성식落成式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의식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도상의 괘불화를 사용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 사찰에서 서로 다른 주제의 괘불이 봉안된 사례가 없을뿐더러 괘불 한 점을 조성하는 데 많은 인원의 모연募緣이 필요한 점, 한 점의 괘불화를 계속 보수하여 사용한 기록 등을 볼 때 한 사찰에서 여러 도상의 의식용 불화를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여러 다양한 재의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의식의 주존으로 석가모니불이 가장 선호되었다.

괘불의 주인공은 석가모니불이 대부분

괘불의 주인공은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많이 그렸다. 특히 영산교주 석가모니불과 석가의 설법이 묘법임을 증명한 다보불[證聽妙法多寶如來], 극락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아미타불[極樂導師阿彌陀佛]의 세 여래와 문수・보현보살, 관음・세지보살을 배치한 형식은 조선 후기 뛰어난 불화승인 의겸(義謙)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용된 이후 괘불을 대표적인 도상圖像으로 널리 제작되었다. 또는 삼신불三身佛이나 삼세불三世佛, 혹은 삼신불과 삼세불이 융합된 도상도 등장했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신체를 장엄한 존상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장엄신괘불莊嚴身掛佛'은 진리를 깨달은 직후 설법하는 보신불報身佛의 형태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는 두 가지 유형으로 제작되는데 일반적인 탱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의식용 불화의 독특한 도상인 괘불 전용 형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초기 괘불은 후불탱화의 확장 형식

괘불 발생 초기인 17세기에 조성된 괘불화는 대체적으로 불전 안의 후불탱화를 대형 화폭에 확장시킨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점차 수미단須彌壇에 앉아 설법하는 모습보다 의식 도량에 강림한 듯한 입상 형식이 선호되었다. 이처럼 불전 내부에 걸리는 불화에서 권속을 생략하고 구성을 단순화한 의식의 주존만을 부각해서 크게 그린 불화가 유행하였다.

2.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근경(1700년, 사진 황호균)

3. 내소사 괘불재 모습(2013년 10월 5일, 사진 황호균)

4.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화기(1700년, 사진 황호균)

5. 괘불지주에 괘불대 고정 모습(사진 문화재청)

6. 괘불대 전체(영천 은해사, 사진 문화재청)

7. 괘불대 부분(영천 은해사, 사진 문화재청)

8. 괘불궤(영천 은해사, 사진 문화재청)

9. 괘불지주(영천 은해사, 사진 문화재청)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