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구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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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함평 구봉마을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19. 02.27(수) 14:37
  • 편집에디터

김철동상과 임정청사

삼일절 100주년을 맞았다. 우리 지역의 관련 시설을 둘러본다. 독립운동가의 혼이 살아 숨 쉬는 데가 의외로 많다. 백범 김구 선생과 엮이는 광주 백범기념관과 보성 쇠실마을이 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신 유일한 사당인 해동사가 장흥에 있다. 함평에는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그 가운데 한 곳,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이 있는 함평군 신광면 함정1리 구봉마을로 간다. 구봉산의 아홉 개 봉우리가 다소곳이 감싸고 있는 마을이다. 흥성 장씨가 처음 들어온 뒤 최씨, 강씨, 김씨가 들어와 살았다. 수십 년 전에는 100여 명이 살면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20여 가구 30여 명이 오붓하게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은 마을에 있는 구봉교회에 다니고 있다.

"구봉산에 금강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요. 물이 마르지 않고, 물맛도 좋고. 명산입니다. 등산로도 좋고, 정상에 전망대도 세워져 있어요."

김만선(69) 구봉마을 이장의 말이다. 2월 28일로 이장의 임기를 마친 김 씨는 일강 김철 선생의 손자이다.

구봉마을은 함평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영광 불갑사 입구에서 신광면 쪽으로 가도 만난다. 함평과 영광의 경계지점이다.

일강 김철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견줄만한 인물이다. 한말인 1886년 함평 구봉마을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 귀국했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의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눠줬다. 노비들에게도 한보따리씩 챙겨주며 자유롭게 살도록 했다. 나머지 재산도 다 정리해서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의 건물문제도 그가 해결했다. 초기 임시정부 청사의 소유권자가 김철이었다.

김철 선생은 상하이에서 여운형 선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1919년 2월엔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손병희 선생 등과 만나 3·1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그해 4월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했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선생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이사를 지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위원장으로 일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폭압에 맞서 김구 선생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비밀리에 일제 지도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통해 독립운동에 활력 불어넣었다.

선생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 와중에 일본경찰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에다 급성폐렴이 겹쳤다. 조국광복을 보기는커녕 1934년 항저우에서 48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은 선생을 기리는 구봉사와 수양관, 기념관으로 이뤄져 있다. 구봉사는 독립된 나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넋이 된 선생을 기리는 사당이다. 기념관에는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실제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다. 지난 2003년 함평군이 김철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 6월부터 1932년 4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기를 담당했다. 청사는 1층 회의실과 주방, 2층 집무실, 3층 숙소로 이뤄져 있다. 100년 전 청사의 건물 내부는 물론,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쓰던 소품 하나하나까지 고증을 거쳐 재현했다. 여기에는 김철 선생의 생전 사진과 유물, 그리고 당시 독립운동 관련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회의실에선 김구·김철 선생과 함께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도모하는 모습도 그릴 수 있다.

당시 일제의 잔인한 만행을 엿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독립운동 역사관이다. 일제가 자행한 야만적인 고문을 주제로 한 사진기록을 보여준다. 일제의 잔학상을 옇볼 수 있는 고문도구도 전시돼 있다. 윤봉길 의사의 참수 장면도 사진으로 만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공간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거사를 앞두고 태극기 앞에서 선서를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를 체험할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돼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본다. 나라 잃은 민족이 타국에서 임시로 꾸린 정부를 보면서 그분들의 독립·애국정신도 느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견줄만한 우리지역의 독립운동 기념시설이다.

김철 선생은 한줌 흙으로 임시정부 청사 뒤편을 지키고 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중국과 국교를 맺지 못했다. 중국에서 김철 선생이 묻혀있는 지역을 개발하면서 묘지도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광복30주년인 지난 1975년 영산김씨 종친회와 지역사회가 뜻을 모아 그 지역의 흙을 한줌 가져와 안장했다. 숭모비도 세웠다.

선생의 묘는 단심송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선생 고향집의 오래 된 소나무인 단심송은 또 하나의 역사로 살아있다. 선생의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이 활발할수록 상대적으로 고향에 남은 가족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에 시달리던 선생의 부인이 목을 매 자결을 했다.

그 나무가 단심송이다. 남편이 집안걱정 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부인의 눈물과 한, 가족의 고통이 배어있는 나무다.

김만선 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기가 막힌다"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 땅의 별로 남은 분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철동상과 임정청사

구봉마을회관

구봉사-김철사당

김철 숭모비

일강 김철

단심송과 김철선생 묘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김철 기념관 내부

독립운동역사관-고문도구

독립운동역사관-고문도구

독립운동역사관-고문도구

임시정부 이동경로

임정청사와 안중근의사동상

임정청사와 안중근의사동상

임정청사 내부

임정청사 내부

임정청사 내부

임정청사 내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