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광주도 '팝 열풍'… DJ 큰 인기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1960~70년대 광주도 '팝 열풍'… DJ 큰 인기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 - 19. 광주 포크 반세기 광주 'DJ 트로이카'
소수옥ㆍ정무일ㆍ이상옥 3명 전성시대 누려
여고생들 신청곡 엽서 예쁘게 만들기 열풍
팝 싱어 박건수, 광주 보컬 그룹 공연 효시
  • 입력 : 2017. 04.13(목) 00:00
MBC 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 DJ 소수옥
● 1960년대 '음악다방의 개척시대'

1959년 서울 종로의 음악감상실 '디쉐네'를 시작으로 1960년대 초, '메트로', '카네기', '쎄시봉', '뉴월드', '라스카라', '아카데미', '아폴로', '시보네' 등이 음악감상실로서 싹을 틔웠다. 한마디로 '음악다방의 개척시대'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방송 디스크 쟈키(DJ)의 등장으로 국내에도 외국 팝의 물결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1964년 동아방송의 최동욱, 1965년 MBC의 이종환과 라디오서울의 피세영. 이 3명의 눈부신 활약이 밑거름이 돼 'DJ트로이카' 시대가 도래했다. 전문음악다방과 DJ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나 둘 씩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광주에서는 1960년도 후반 무렵, '카네기' 음악감상실이 현 충장로 1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5층에 선을 보였다. 광주 음악감상실의 시작이었다. (그곳에서 광주 최초의 DJ를 한 적이 있다고 전해지는 양회권씨가 DJ였는지 플레이어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1969년 CBS에 근무하던 소수옥이 충장로 3가 용아빌딩에 전문음악감상실 '심지다방'을 운영했다. 그 즈음 황금동 (제일극장 입구 쪽)에 위치한 '르네쌍스'에서는 권혁상과 이상옥이 활약했다. 같은 시기 충장로 4가에 '화신다방'이 오픈하고 정무일이 DJ로 발돋움했다.

이상옥의 DJ 데뷔는 특이했다. 그의 친구였던 권혁상이 고교시절 학교 방송반에서 아나운서를 경험한 바 있었고, 졸업 후 르네쌍스에서 DJ로 일하고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상옥이 대신 나섰다가 DJ로 신장개업을 한 것이다.


●대학 재학 중 방송 PD 된 이상옥

방송 프로듀서가 꿈이었던 이상옥은 1969년 말 CBS의 소수옥이 MBC로 옮겨가자 CBS 광주방송국의 음악 프로듀서 모집에 응시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응시자격 미달임에도 당시 방송국장이던 서주봉 국장에게 간청해 어렵사리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했다. 고교시절부터 동경했던 프로듀서의 꿈을 대학 재학 중 이루게 된 것이다. 이상옥은 1971년 4월24일 전일방송(VOC)이 개국하자 자리를 옮겼다.


●광주, 'DJ트로이카' 시대 도래

문화에도 시대적 향기가 있는 것일까. 문화라고 하는 '바늘'에 방송이라는 '실'을 달고 빛고을 광주에 팝의 유행이 물결을 타고 서서히 용트림을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정목일이 CBS에 둥지를 틀면서 광주에도 서울의 최동욱, 이종환, 피세영처럼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소수옥, CBS '꿈과 음악사이' 정무일, VOC '밤을 잊은 그대에게' 이상옥 등 3명의 방송 DJ들이 어마어마한 인기속에 트로이카로서의 면목을 과시했다.


●1970ㆍ1980년대 노스탤지어

1970년 즈음부터 전국적으로 심야방송 DJ와 라이브무대 통기타 음악이 위세를 타기 시작했다. 광주에도 시대적 흐름을 타고, 전문음악 감상실이나 음악다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시절을 향유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마음속에 지나간 날들의 추억들을 다시 불러내게 한 향수의 단어가 '7080'이다. 그것은 분명 우리들에겐 아름답고 진한 노스탤지어다.


●야간통행금지도 두렵지 않은 여고생들

당시 특히 여고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방송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청곡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예쁜글씨로 사연과 신청음악을 보내곤 했다. 엽서가 방송이라도 타게되면 다음날 학교에서 괜시리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하기 바빴다. 어느 방송 누구의 프로그램을 들어야 된다느니 하는 편가르기도 비일비재했다.

광주 MBC의 경우, 매주 토요일이면 예쁜 엽서를 선정해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계절에 관계없이 예쁜 엽서를 모아 사옥 로비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별이 빛나는 밤에'가 끝나는 시간은 평일 오전 1시, 토요일 오전 2시였다. 당시에는 야간통행금지 시대여서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하는데도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방송국 로비에 진을 치는 장면이 연출됐다. 방송 DJ나 출연가수, 연예인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였다. 학생들의 귀가를 위해 그때마다 손등에 MBC 로고와 '방송출연'이라는 도장을 찍어주고 귀가시키곤 했다.


●절친이었던 소수옥과 정무일

광주시 동구 불로동 137번지와 138번지는 정무일과 소수옥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로, 둘은 어릴적 친구다. 흔히 말하는 죽마고우다. 중ㆍ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기 동창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방송 DJ로 같은 직업을 가졌다. 절친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70여년을 지냈으니 오죽하랴.

소수옥과 정무일.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고 말할지 몰라도,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그게 어디 보통의 인연이겠는가. 살아오면서 애증의 세월 또한 없지는 않았겠지만…. 단 몇 미터도 안되는 유년시절의 옆집 친구요, 중ㆍ고등학교 동창에 직업마저 같았으니 둘 사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말해야 할지. 얼마 전 술자리에서 정무일 선배께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수옥이는 광주의 전설이야." 친구를 높이는 그 마음자세에 감동 받기도 했다. 그렇다. 달빛 아래 모든 것은 푸르다더니 그 푸른 마음이 자기의 격을 높이는 게 아닐까.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두 사람의 마음이 언제까지나 푸르렀으면 좋겠다.


●팝 싱어 박건수와 'Young People'

1970년대 초 광주에도 보컬 그룹이 있었다. (후에 보컬 그룹이란 단어를 그룹 사운드로 부르게 된다.) 박건수가 리더인 보컬 그룹 'Young People'이 광주에서 발돋움을 시작한 때가 1970년이다. 그는 전남대 재학 중에 기타 김용, 베이스 서인범, 서울에서 드럼 백학송을 규합하고 충장로 3가 용아빌딩 5층에서 조련을 시작, 그해 1970년 10월 25일 개관한지 얼마 안된 황금동의 학생회관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보컬그룹 공연으로는 광주의 효시다. 광주 출신으로만 구성된 멤버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광주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박건수는 항상 홀로 싸웠다. 솔로로 독립 후 개인 리사이틀을 수없이 치렀다. 본인이 그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팝 싱어로 잘 알려졌지만 그의 DJ 경력이나 실력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초 일류급이었다. 특히 30여 회 이상의 개인 콘서트 기록들은 광주에서 만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스스로 탑을 쌓았던 그의 지난날들에는 분명 찬란했던 빛이 있었다.

통기타 가수ㆍ문화공연시민기자
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