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7> 이민자들 강한 생명력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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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7> 이민자들 강한 생명력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뉴욕, 뉴욕, 뉴욕 강한 생명력, 차이나타운
  • 입력 : 2022. 05.26(목) 16:11
  • 편집에디터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이민자의 역사

1903년 1월 13일, 한국인 최초 미국 이민자가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들이 적극 알선한 결과였다. 그들 중 상당수(남녀 50명과 노동자 20명)가 감리교 교사나 통역사였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민 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조국이 식민지가 되자 신앙심만큼이나 애국심도 강조되었다.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그 뒤 미국은 한동안 아시아계 이민자를 받지 않다가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유럽계뿐만 아니라 비유럽계, 그러니까 아시아나 중남미,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원인에 대해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는 "소련과 이념 경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비서구권 국가에서 일렁이는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려면 인종차별적인 짐 크로법의 이미지를 지우고 재부팅해 미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해야 했다고 한다. 그 해결책은 가난한 그들을 미국 유입을 허락해 직접 실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아메리칸 드림 행렬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한국보다 100년 앞서 아시아계 중에서 최초로 미국 본토에 발을 들인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후 대농장의 노예를 대체할 싼 인력이 필요했다. 19세기 미국 팽창기에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할 막노동꾼 또한 절실했다. 이민 노동자가 된 그들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처참한 노동 환경을 견뎌야 했다.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철도 건설의 경우 땅에 다이너마이트 구멍을 파고 대륙 횡단 철도가 지나다닐 철로를 놓다가 다이너마이트에 폭사하거나 폭설에 파묻혀 죽은 경우가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2마일씩 늘어날 때마다 평균 세 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가 있을까.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882년 미국은 중국인 이민을 금지한 최초의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했다. 생김새와 문화가 다른 그들을 도저히 받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의원들과 언론은 중국인을 '쥐새끼', '문둥이'이자 선량한 백인 미국인에게서 일자를 빼앗는 '기계 같은' 일꾼이라고 규정했다. 자경단까지 활동하며 중국인 가게에 폭탄을 장치하거나 불을 지르거나 총을 쏘아댔다. 1871년에는 중국인 몇 명이 백인 경찰을 살해했다는 유언비어에 500명에 달하는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이 떼 지어 LA 차이나타운에 들이닥쳤다. 중국인 성인 남자와 소년 18명을 고문하고 목매달아 죽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린치 사건이었다. 1917년 미국 정부는 이민 금지를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 적용했다. 필리핀은 한때 미국의 식민지였는데도 필리핀 사람들의 이민마저 제한했다.

이렇듯 오래된 이민의 역사만큼이나 혐오의 대상이었던 중국 이민자를 다시 소급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한 바이러스로 끈질기게 반복 지칭하면서 인종주의자를 자극시켰다. 인종주의자들은 아시아계 사람들을 다 싸잡아 코로나 그 질병 자체처럼 취급했다. 수면에 가라앉았던 그들의 혐오를 어김없이 표출시키도록 정권이 도운 것이다. 팬데믹 동안 심심찮게 인종 혐오로 발생한 사건사고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차이나타운

내가 브루클린 다운타운에서 시작해서 브루클린 다리를 지나 뉴욕 차이나타운으로 걸어갔던 때는 뉴욕시 셧다운이 풀린 지 두어 달이 지난, 2021년 7월 3일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높은 그곳은 그때부터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주로 중국인들의 쉼터인 콜롬버스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거나 오락거리를 즐기는 편한 차림의 그들을 봤을 때는,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팬데믹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브루클린 다리를 걸을 때부터 나는 고층 건물을 아름다움을 두 눈에 두고 왔다. 그런 세련됨이 일시에 멈추고는 축지법을 사용한 듯 중국의 한 시장골목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와 또한 조우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뉴욕 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차이나타운에서만은 차이나타운의 질서에 편입해야 할 것 같았다. 다국적 기업인 맥도널드나 하겐다즈의 간판조차 한자로 적혀 있었다. 멀리서도 금방 눈에 들어오는 붉은 등이 거리마다 신호등이 걸려 있는 듯한 느슨한 줄에 매달려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인이 되레 여행자처럼 느껴졌다.

뉴욕 차이나타운. 차노휘

나는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낡은 건물 사이를 누비며 여러 상점들을 쇼핑을 했다. 맨해튼의 비싼 물가를 약간 비껴간 그곳에서 물건을 흥정하면서 억센 여행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갔을 때였다. 느긋하게 문 틈사이로 긴 곰방대를 내놓은 한 노인과 가게 안에서 아기를 안고 손님을 맞이하는 젊은 여자를 봤을 때는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차이나타운은 세계 어디에나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한다.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곳 또한 앞서 언급한 철도 노동자들이 1860년대에 모여들어서 세운 곳이다. 노동자보다 더 여자들의 삶이 더 비참했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납치되어 미국 땅을 밟은 중국인 여성은 여관에 감금된 채 하루에 열 차례씩 강간당하였다.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결국 매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길거리에 버려져 홀로 죽어갔다. 여자의 아기가 칭얼댔고 여자가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자 나는 다른 곳을 구경하고 다시 온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 곳곳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고 심지어 털을 다 벗겨낸 닭과 오리들이 윈도우에 장식구처럼 걸려 있었지만 그것 또한 강한 생명력으로 빛나보였다. 그들을 강하게 하는 것은 뭘까. 아니, 먼 곳에서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비참함을 견뎌낸, 이민자들의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또다른 질문들을 연달아 만들어내며 걷고 있었다. 차노휘〈 소설가, 도보여행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