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전 푸른 눈의 목격자, 그의 이름은 '임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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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42년 전 푸른 눈의 목격자, 그의 이름은 '임대운'
●5·18 42주년 특집-기록을 넘어 시대를 넘어|| 데이비드 돌린저 前평화봉사단원 ||80년 봉사단 활동 중 항쟁 참여 || 도청서 하룻밤 도운 유일 외국인 ||금남로서 헬리콥터 사격 목격도||“진실된 역사 알리고 싶어 노력”
  • 입력 : 2022. 05.16(월) 17:44
  • 정성현 기자

16일 광주 북구 전남대 정보마당에서 열린 '나의 이름은 임대운' 북토크에서 만난 데이비드 돌린저. 정성현 기자

"20·30대 젊은이, 무장 군인, 장갑차, 헬기 그리고 총격…"

1980년 당시 영암보건소에서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데이비드 돌린저(66) 씨는 '5·18민주 항쟁'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항쟁 발생 이전인 5월16일부터 최후 항전일이었던 27일까지, 그가 광주에 머물며 보았던 참상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올해 5월, 돌린저씨는 본인이 직접 겪었던 광주항쟁의 모습을 '회고록'으로 펴냈다. 그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집필하게 됐다"고 발간 이유를 밝혔다.

●'유혈 진압…일치되지 않는 뉴스'

1980년 5월16일. 돌린저 씨는 다음날 있을 봉사단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행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군부의 광주 과격진압의 빌미가 된 '3차 민주화대성회 평화 횃불 행진'에 참여한다.

그는 그날에 대해 "매우 평화로웠다. 교통정리만 하는 정복 차림의 경찰만 있을 뿐, 전투경찰은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군부가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 18일, 모든 상황은 바뀌었다. 거리에는 최루가스 냄새로 가득했고, 무장한 군인들과 군용트럭이 늘어섰다. 광주 시내로 향한 그는, 곳곳에서 시민들의 연행 소식과 계엄군의 유혈 진압 소식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돌린저 씨는 다음날 오전 근무지인 영암으로 돌아왔지만, 군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을 통해, 군부의 폭력이 이전보다 더욱 과격해졌고 전화마저 끊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그는 계엄군이 처음으로 시민에게 발포했던 21일, 다시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총성이 들려 하늘을 쳐다보니, 한 군인이 금남로 상공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이날 시민들은 '투쟁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때 '광주를 돕자. 그리고 기록하자'고 다짐하게 됐다"고 생생히 전했다.

이후 돌린저 씨는 외신 기자들의 취재와 통역을 도맡아 하는 등 광주에서 시민들과 생사를 함께했다. 특히,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린 24일에는 '5·18 최후항전지'인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우며 라디오 영어 방송을 번역하는 등 계엄군 동향을 시민군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도청을 지킨 '유일한 외국인'으로 알려진 것도 이 까닭이 크다.

1980년 5월22일 전남대병원 옥외에 마련된 임시병상에 부상자들이 누워있다. 호하스·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광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진실'

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참극으로 막을 내린 후, 돌린저 씨는 평화봉사단원에서 해임됐다. '파견국의 정치 상황에 중립을 지킨다'는 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미 평화봉사단원 중 이 사유로 해임된 사례는 그가 유일하다.

돌린저 씨는 해임 이후 국내에 잠시 머물다 1981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인권단체 소속으로 활동하는 등 '5·18 알리기'에 노력했다.

그는 △워싱턴 DC 광주항쟁 연설 △하버드대 광주항쟁 10주년 연설 △유엔 한국 인권 청원서 제출 등 그날의 참상을 전할 자리만 있다면, 어디든지 향했다.

돌린저 씨는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왜곡된 항쟁의 역사를 바로잡고 싶었다"며 "평화봉사단을 할 때 부여받은 '임대운'이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고 말했다.

이어 "도청에서 윤상원·학생위원회 등이 기자회견 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오늘이 자신들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함께 했다"며 "광주에서 내가 보고 겪었던 일들은 당연히 해야 했고,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이 생각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0년 하버드대학교 '광주항쟁 10주년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돌린저. 호하스·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그는 '80년 오월 광주'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일어났고, 시민들은 군부에 저항했습니다. 5·18이 만들어낸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영웅이 아닌,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우리는 광주의 시민이었고,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이 항쟁의 정신은 전 세계가 배워야 하며, 모두가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돌린저 씨의 회고록은 지난 12일 한국에서 영문판과 한국어판이 동시에 출간됐다. 회고록 제목은 '나의 이름은 임대운'(영문판 Called by Another Name)이다.

그의 회고록은 앞서, 평화봉사단으로 나주에 파견했던 폴 코트라이트의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이어 외국인이 쓴 두 번째 광주항쟁 회고록이다. 둘 다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낸 최용주 박사가 번역했다.

1981년 6월 국제 인권법 단체가 유엔에 한국의 인권 관련 청원서를 제출할 때 쓴 데이비드 돌린저의 수기. 호하스·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데이비드 돌린저의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 표지. 호하스·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