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1> 바람 따라 전설 따라 한라산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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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1> 바람 따라 전설 따라 한라산 걷기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한라산
  • 입력 : 2021. 10.07(목) 14:59
  • 편집에디터

영실에서 윗세오름 가는 길. 차노휘

1)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설문대할망에게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할망은 어느 날 아들들을 위해서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고 있었다. 워낙 솥이 커서 나무 주걱을 크게 휘젓는다는 것이 부뚜막에 손을 짚고 중심을 잡고 있던 팔목을 쳐버렸다. 그만 할망이 솥에 빠져버렸다. 일을 하고 돌아온 아들들은 여느 때보다 더 죽을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에 귀가한 막내는 솥에 남은 뼈를 보고는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막내는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형들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었다. 차귀도로 가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형들은 한라산 영실로 올라가서 돌이 되었다. 형들이 돌이 된 그곳을 영실 기암, 즉 '오백장군' 혹은 '오백나한'이라고 부른다.

올레를 걷다보면 이색적인 풍광뿐만 아니라 독특한 전설도 많이 접한다. 그 중에서 한라산과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으뜸이다. 어디서든 한라산을 볼 수 있듯이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며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한라산을 방향 지표 삼아 위치를 말하는 것도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레를 걷는 사람이이라면 한번 즈음은 한라산에 가도 좋다. 제주도에 온 것만으로 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병풍바위. 차노휘

비교적 초보자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한라산의 한 자락인 영실이다. 1,200m 고지에 있는 '오백장군과 까마귀'라는 휴게소에서 출발하면 윗세오름(1,700m)까지 넉넉잡아서 왕복 서너 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가파르다. 힘들지만 풍광만은 천상의 것이다. 나무 계단을 오르다가 땀을 식히기 위해 뒤돌아보면 깎아지른 듯한 오백나한 기암과 그 바위에 걸쳐 있는 구름(아니, 구름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저 먼 곳의 오름 봉오리 그리고 마을들을 한 눈에 다 넣을 수 있다. 어디 마을뿐일까. 인간 세상을 발아래에 둔 듯 하다가 설문대망할망의 뼈처럼 표백제를 바른 듯 말라죽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구상나무 군락으로 들어서면 신들의 거처를 남몰래 침입한 듯하다. 드디어 윗세오름 1,400m 고지에 발을 디딘다는 것이다. 윗세오름은 1,100고지 세오름에 비해 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붉은 오름, 누운 오름, 족은 오름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그곳에서 탁 트인 평야를 마주할 수 있다. 1,600~1,700m 고지에 이국적인 너른 고산 평야(선작지왓)라니… 먼 곳은 영령스런 백록담 화구가 보이고 왼쪽에는 오름을 끼고 오른쪽에는 구름과 동무하며 좁은 길을 한참을 걷다보면 노루샘을 볼 수가 있다. 그곳에서 물 한잔 마셔도 좋다.

윗세오름에서 보는 백록담 분화구. 차노휘

바람이 유독 많이 부는 가을 날 그곳에 오른 나는 윗세오름 전망대에 올랐다. 올 때마다 안개가 점령했는데 그날은 바람이 유독 불었다. 간간이 까마귀가 날아와서 밋밋한 하늘에 포인트를 넣었다. 전망대에서 마음껏 바람을 맞으며 360도 수려하게 펼쳐지는 광경을 탐할 때에야 알았다. 바람이 많은 제주도는 바람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그는 오랜 시간 꾸준히 정성을 들여서 산과 들 그리고 나무들의 형상을 다듬어 놓았다. 이제는 내 머리카락을 날려주면서 내게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비죽비죽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나 뻗어 나온 감정 선들을 섬세한 손길로 다듬어주고 있었다.

백록담. 차노휘

2)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

10월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오르는 길목도 바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2021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탐방예약제인 하루 1,500명(성판악 1,000명, 관음사 500명) 제한으로 사전예약을 하고 OR코드를 받아야 입장이 가능해진 그곳. QR 코드를 받고 입장을 하고 숲 속으로 들어서면 머리 위에서 파도가 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머리 위에서 물결이라니, 식생매트나 덱 그리고 우둘투둘한 현무암 돌을 밟고 백록담으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심해를 걷는 것과 같았다.

바람 따라 전설이 오듯 이곳 또한 설문대할망 뒷담을 빼놓을 수가 없다. 실은 그녀가 한라산을 만든 장본인이다. 치마폭에 흙을 담아서 후딱, 만들어버린 것이 이 거대한 산이다. 만드는 중에 조금씩 흘린 흙이 360여 개의 오름(작은 산)이 되었다. 그녀의 키가 어찌나 큰지 한라산과 제주시 북쪽 먼 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두 발을 디디고 바닷물에 빨래를 할 수도 있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 오르는 길. 차노휘

그녀에게는 '후딱'이지만 인간에게는 성판악에서 백록담(1950m)까지, 9.6km를 '힘들게' 걸어야 한다. 보통 4시가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출발지에서 4.1km에 속밭 대피소가 7,3km에 진달래밭 대피소가 있어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12시 30분까지 통과해야 하고, 정상에서는 늦어도 2시에는 하산해야 한다. 워낙 긴 거리라 안전한 산행을 위한 시간 계산인 것이다.

바람 파도가 만들어 내는 그 길을 간혹 까마귀들의 합창까지 곁들여 들으면서 4시간 걸었을 때 정산 분화구 백록담(白鹿潭)에 도착했다. 설문대할망이 뾰족한 한라산이 보기 싫어 꼭대기만 잘라 던져서 생긴 백록담(던져버린 부분은 제주도 서남쪽에 있는 산방산(山房山)이 되었다). 백록담은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물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간 날은 푸른 풀밭 한 가운데에 동그라니 물이 차 있었다.

말라가는 구상나무. 차노휘

분화구 주위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곳과 멀찍이 떨어진 덱에 앉았다. 발아래에 둔 구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 너머에는 인간 세상이 있고 그리고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어디 즈음에 내 집이 있고 내 이야기가 있을 것인데… 그 이야기의 한 자락을 펼쳐놓고자 하는 욕망을 꾸역꾸역 참고 있는 나를 백록담에서 발견했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만남이기에 나는 충분히 내 자신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설문대할망의 위트 같은 바람으로 땀을 식히면서 말이다. 차노휘 〈소설가, 도보여행가〉

백록담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풍경 .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